전범기의 재활용
전범기의 재활용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9.15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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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기(戰犯旗)는 전범국가(戰犯國家)의 상징적 깃발로, 일본의 욱일기(旭日旗)와 독일의 하켄크로이츠(Hakenkreuz)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두 전범기의 운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180도로 달라진다.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겸허한 시각과 부끄러운 역사를 애써 지우려는 수정주의 시각으로 갈라선 탓이다.

나치독일의 나치당기와 완장표지로도 쓰인 하켄크로이츠는 히틀러(1889∼1945)의 몰락과 함께 깃대가 꺾인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다. 독일어로 ‘갈고리’를 뜻하는 ‘하켄(Haken)’과 ‘십자가’를 뜻하는 ‘크로이츠(Kreuz)’의 합성어인 하켄크로이츠(?, 일명 ‘갈고리십자’)를 독일정부는 대전 이후 법으로 금했다. 과거의 일그러진 역사에 대한 통렬한 참회가 그 밑거름이었다.

그러나 역사수정주의 망상에 사로잡힌 아베와 그의 손아귀에 잡힌 일본정부는 전혀 딴판이다. 군국주의 부활의 발판으로 욱일기만큼 재활용 가치가 큰 것도 없다는 판단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꼴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욱일기 쇼’가 기승을 부리는 것도 다 그 때문이 아닐까. 욱일기를 도쿄올림픽의 응원도구로 사용하겠다는 낯 두꺼운 배짱도 그런 인식의 소산임이 분명하다.

그 주체가 ‘일본회의’ 소속 극우단체이건 각료의 79%를 일본회의 골수분자로 채운 아베 총리(일본회의 특별고문)이건, 사전작업은 상상외로 치밀해 보인다. 미국인 화가 뷰 스탠튼이 로스엔젤리스(LA) 한인타운 중심가 공립학교의 체육관 외벽에 그려 수개월간 논란의 불을 지핀 ‘욱일기 문양 벽화’는 상징적 사례의 하나일 뿐이다.

근착 뉴스는 놀라운 소식 하나를 더 전한다. 폴란드의 주스회사 호르텍스가 욱일기를 제품의 디자인으로 사용하다 한국인들의 항의에 부딪혀 생산을 중단키로 한 일이 그것. 이 당찬 일의 주인공은 한국외대 폴란드어과 학생 조중희(24)씨였다. 지난달 폴란드에서 인턴생활을 하던 그는 SNS에 폴란드어로 “욱일기가 나치독일의 하켄크로이츠와 같은 의미”라는 글을 올리며 디자인 교체를 요구했고, 이를 본 폴란드 교민들도 항의메일 보내기에 기꺼이 동참했다.

2차 세계대전 초기, 나치독일의 가장 큰 피해당사국이었던 폴란드의 기업 호르텍스는 결국 우리 교민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두 손을 들고 만다. 단서가 포착된 건 아니지만, LA 한인타운 중심가 학교의 벽화 사태에서 보듯, 이 과정에도 일본 우익들이 음흉한 수법으로 극우(極右)본색을 드러냈을 개연성이 높다. 한국의 학계와 정계에게까지 매수의 손길을 뻗치면서 유엔에서는 ‘포스트 플레이’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 그들이 순진하거나 금전에 눈이 먼 타국인들에게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한국과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욱일기 문양 사용 원칙을 고수하는 도쿄올림픽조직위의 거드름은 본체만체 뒷짐만 지고 있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그런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지 싶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선에서 나치독일군에 맞서 싸웠고 한국전쟁에도 참전했던 미 육군 45보병사단이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1939년 4월)까지 사단 마크로 ‘갈고리십자’를 사용한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이 문양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천둥새’ 상징 문양에서 따왔으나 나치가 사용하면서부터 금기(禁忌)의 표적으로 둔갑하고 만다.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 사용했느냐가 선악(善惡) 판단의 새로운 잣대로 작용했던 것.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가 경성부청 건물에 나치와 일제의 동맹을 기념해 일장기와 하켄크로이츠를 나란히 게양한 사실도 흥미롭기는 마찬가지다. 두 전범기가 초록동색(草綠同色)으로 치부되던 때의 일이기는 하지만….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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