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말싸미 - 세종과 한글에 보내는 헌사
나랏말싸미 - 세종과 한글에 보내는 헌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8.15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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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랏말싸미' 한 장면.
영화 '나랏말싸미' 한 장면.

 

지난달 개봉한 조철현 감독의 <나랏말싸미>가 관객들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 건 딱 하나다. 바로 역사를 왜곡했다는 것. 이 영화는 세종과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그 동안의 정설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데 한글창제의 주역은 그들이 아니라 세종과 신미대사를 비롯한 스님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글창제의 야사 가운데 하나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신미대사 조력설’을 토대로 제작된 셈이다.

신미대사 조력설의 가장 유력한 근거로는 훈민정음 서문이 108글자로 이뤄졌다는 것. 한글창제 과정에서 신미대사 등 스님들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세종이 불교에서 중생의 번뇌를 108가지로 분류한 백팔번뇌를 서문에 글자의 수로 담아냈다는 것이다. 실제로 훈민정음 서문은 108글자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역사왜곡 논란만 제외하면 이 영화, 꽤 잘 만들어진 작품이다. 세종 말기 아픈 몸을 이끌고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 한글을 창제했던 그 과정이 다소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과학적이면서도 무게감 있게 잘 담아냈다. 폭포수가 아니라 작은 실개천처럼 같은 높이로 잔잔하게 흐르는 듯한 느낌도 좋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송강호가 연기한 세종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이준익 감독의 2015년작 <사도>에서 그가 연기한 영조보다 개인적으로는 더 좋았다. 그렇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건 한글창제의 진실보다는 최고 권력자로서 세종의 마인드와 행동에 있었다. 그건 한글을 창제하려 했던 세종의 뜻과 근본적으로 궤를 같이하는데 그로부터 600여년이 지난 지금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아니, 달을 보라는데 왜 다들 손가락을 쳐다보는 건지. 손가락에 꿀 발라 놓은 것도 아닌데.

사실 그렇잖은가. 신미대사 조력설이 맞든 안 맞든 한글은 분명 창제됐고, 사대주의에 젖어 중국 한자를 숭배하며 일반 백성들은 무시했던 양반 중심의 사회에서 약자인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창제하려 했던 그 ‘정신’은 분명 존재하지 않았던가.

조철현 감독이 <나랏말싸미>를 통해 하고자 했던 이야기도 바로 이거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 속에서 세종(송강호)과 신미(박해일)의 위치는 극과 극이다. 숭불정책(불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폈던 고려가 망한 뒤 들어선 조선은 숭유억불(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 정책을 고수했다. 그 때문에 세종이 임금으로서 나라의 가장 고귀한 사람이라면 스님인 신미는 가장 천한 신분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영화 속에서 세종은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쳐 나오는 신미의 입바른 소리를 경청할 줄 알았다.

오히려 신미가 세종에게 역정을 내며 꾸짖을 때도 있었는데 관객인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으니 다른 왕 같았으면 단칼에 머리를 베고도 남았을 터인데 세종은 그러지 않는다. 물론 영화 속 설정일 수 있겠지만 그러한 성군의 정신이 한글을 만든 토대가 된 건 분명하지 않는가.

영화 초반 일본의 승려들이 조선을 찾아 팔만대장경 원판을 내놓으라고 궁궐에서 시위를 벌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숭유억불 정책의 조선은 이제 불교의 팔만대장경이 필요가 없으니 달라고 땡깡을 부렸던 것. 그러니까 고려 시대 몽골의 침입에 맞서 민심을 모으고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무려 16년 동안의 대역사 끝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무려 8만 여개의 판수를 자랑하며 8만4천개의 경전 말씀이 실려 있는 그 팔만대장경을 말이다.

당시 조선보다 미개했던 일본은 만들 능력이 안 됐다고 한다. 이건 영화 속 설정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은 그 때도 참 어이가 없는 나라였던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영화를 보면 우리 민족의 자긍심이 제대로 느껴진다. 현재 우리나라보다 강대국으로 대접받는 일본은 자기만의 문자가 없어 중국의 한자와 그것을 변형한 히라가나를 아직 쓰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문자를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여실히 깨닫게 된다.

한글이 왜 과학적이고 위대한 문자인지는 연필이나 펜을 멀리하고 컴퓨터 자판을 주로 두드리기 시작하면서 가끔씩 느끼고 있다.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인이나 일본인들은 얼마나 불편할까’라고 생각하면서. ‘했다’와 ‘했더랬다’는 같은 의미지만 맛은 다르다. 전자가 그냥 서 있다면 후자는 춤을 춘다. 이 작은 차이가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아직도 한자를 쓰고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해서 글로 밥벌이를 하며 행복의 8할을 글을 쓰면서 느끼는 사람으로서 가끔은 이런 생각까지 한다.

이 나라에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라고. 땡큐! 세종 각하 대통령님! 아니 대왕님!

2019년 7월24일 개봉. 러닝타임 110분.

취재1부 이상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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