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트니-보디가드, 그후 27년
휘트니-보디가드, 그후 27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6.27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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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케빈 코스트너’라는 배우는 조금 특별하다. 내가 케빈 코스트너를 처음 만나게 된 작품은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였다. 1992년작인데 재수해서 대학에 붙고 난 후에 비디오로 보게 됐었다.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극중에서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을 파헤치는 짐 게리슨 검사역의 케빈 코스트너가 너무 멋져 보였던 것. 왜 살다보면 배우든 주변 사람이든 닮고 싶은 존재가 한 명쯤 있잖은가? 그 시절 난 케빈 코스트너였다. 한참 멋 부리던 때여서 그의 멋진 외모도 외모였지만 영화 속에서 부당한 권력에 맞서 진실을 파헤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가뜩이나 법대에 붙어 법조인에 대한 꿈을 막 꾸기 시작하던 터라 실화를 바탕으로 한 는 내게 헛바람을 마구 불어넣기 시작했었다.

그랬다. 나도 극중 짐 게리슨(케빈 코스트너) 같은 멋진 검사가 되고 싶었고, 나중에 장준하 선생 실족 사망사건 같은 굵직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파헤쳐 보겠다고까지 생각했었더랬다. 하여간 그 시절엔 어찌나 가소로웠던지.

그랬거나 말거나 얼마 뒤 나는 어린 마음에 신처럼 떠받들던 케빈 코스트너의 작품을 입학 직전에 한 편 더 만나게 됐는데 그게 바로 <보디가드>였다. 경호원으로서도 케빈 코스트너는 여전히 멋졌지만 그 영화에서는 여주인공이었던 휘트니 휴스턴도 제대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인 팝스타로 흑인 여가수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그녀가 극중에서 부른 ‘I Will Always Love You’는 사랑 안할 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얼마 뒤 알게 됐지만 당시 그녀는 머라이어 캐리 및 셀린 디옹과 함께 세계 3대 디바로 군림했고, 케빈 코스트너나 휘트니 휴스턴이나 그렇게 <보디가드>를 통해 인생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시작이었다. 원하는 대학까지 들어간 만큼 당시 난 더 큰 인생의 전성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 감히 생각했었더랬다. 비록 분야는 달랐지만 나 역시 그들처럼 언젠가 반짝반짝 빛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 그러고 27년이 지났고, 난 며칠 전 지금은 고인이 된 휘트니 휴스턴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휘트니>를 보게 됐다.

사실 그 긴 세월 동안 휘트니 휴스턴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은 <보디가드>에서 ‘I Will Always Love You’를 천상의 목소리로 부르던 모습이었다. 거기서 딱 멈춰 있었다. 그러다 2012년인가. 그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마이클 잭슨 이후 또 한 명의 불멸의 팝스타가 세상을 떴구나’라는 정도였다.

그런데 영화 <휘트니>를 통해 27년만에 다시 만난 휘트니 휴스턴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팝스타로 행복한 삶을 살았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삶이 사실은 불행하기 그지없었던 것.

역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듯. 개인적으로 가장 믿기 어려웠던 건 내가 기억하는 <보디가드>에서의 모습 이후 그녀는 거짓말처럼 지난 27년간을 줄곧 내리막길만 걸었다는 것. 허나 그 내리막길은 실패에 따른 내리막길 같은 게 아니었다. 영화 초반 등장하는 휘트니의 대사처럼 그냥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늘 폭풍과 거인에게 쫓겨 다녔다.

그 폭풍과 거인은 어떤 때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이었고, 또 어떨 땐 사랑이기도 했고, 때론 마약(쾌락)이기도 했다. 마침내 그 폭풍과 거인은 그녀를 집어삼켰고, 내가 이제껏 기억하고 있었던 천상의 목소리를 지닌 세계적인 팝스타로서의 ‘휘트니 휴스톤’은 그저 쓰레기장에 핀 한 송이 꽃 같은 것이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휘트니가 말한다. “어떨 땐 하늘을 향해 이렇게 물었어요.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요?”

맞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성공은 사치고, 인생이란 나쁜 일만 없어도 행복하다는 걸 깨닫게 되는 과정 같은 것. 해서 나 역시 <보디가드> 이후 지난 27년은 ‘내리막길’ 같은 팔자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해답을 구하는 과정이었을 뿐. 하지만 그건 어디 나만 그럴까. 휘트니도 그랬는데. 마이클 잭슨도 마찬가지였을걸? 심지어 우리 케빈 코스트너 형도 그랬을걸.

이쯤 되면 그 해답이 궁금하겠지. 그런데 내가 내린 결론은 아이러니하게도 이거였다. ‘살아있으니까. 살아있으니까 고통도 느끼는 거지’ 이건 슬픈 의미가 아니다. 사실 지난 27년간 내가 휘트니보다 잘한 건 아직 살아있다는 것. 휘트니는 마흔 여덟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영화에 따르면 딸을 방치한 죄책감이 가장 컸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자 난 그녀에게 문득 이 한 마디만은 꼭 해주고 싶었다. “휘트니. 당신 잘못이 아니야.”

2018년 8월23일 개봉. 러닝타임 120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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