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추억으로 숙성되기까지-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기억이 추억으로 숙성되기까지-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6.20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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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과거의 일이라 해도 기억과 추억은 다르다. 일단 과거의 일은 모조리 기억의 영역에 속한다. 기억이란 것도 신분이 나뉘는데 아예 기억으로 남을 수조차 없는 비천한 일상들이 있는가하면 그나마 기억은 됐지만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들도 수두룩하다.

허나 그런 과거의 일들 속에서도 ‘좋았던 일’과 ‘나빴던 일’은 다르다. 전자는 좋았기 때문에, 후자는 나빴기 때문에 각각 기억으로 저장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기억에도 행복과 고통이란 게 엄연히 존재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로 유명한 ‘마르셀 프루스트’도 기억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한편 추억은 무적(無敵)이다. 아픈 기억은 있어도 아픈 추억이란 없다. 현재와 한참 멀어져 클래식해진 추억은 다 좋다. 우리들 개개인의 삶에도 명작이나 명품, 명곡이 존재한다면 그건 아마도 8할이 추억 아닐까.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는 추억은 우리를 늘 웃음 짓게 만든다. 실패나 상실의 아픈 기억도, 때론 헤어짐의 슬픈 기억도 추억으로 승화되면 찬란하게 빛이 난다.

기억이란 게 그렇다. 현재와 멀어질수록 더 아름다워진다. 다만 아프거나 슬픈 기억마저 추억이 되기 위해선 숙성의 과정이 필요한 법.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그렇게 기억이 추억으로 숙성돼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폴(귀욤 고닉스)은 2살 때 사고로 아빠와 엄마를 여의고 두 명의 이모들 손에 자랐다. 어느덧 서른셋의 나이를 먹은 폴은 일찍 부모를 잃은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려 말이 없었다. 웃지도 않았다. 그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만들려했던 이모들에 의해 댄스교습실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게 일상의 전부였다.

그런데 2살 때 멈춘 부모에 대한 폴의 기억은 조금 잔인하다. 따뜻했던 엄마에 대한 기억은 좋지만 아빠에 대한 기억은 그렇지 않았던 것. 여자처럼 긴 머리에 터프한 록커 같은 모습의 아빠는 악몽 그 자체였다. 실제로 폴은 지금도 아빠가 꿈에 나타나면 악몽을 꾼 것처럼 식은땀을 흘리며 놀라 잠에서 깨곤 했다. 결국 서른셋의 폴의 삶을 지금도 우울하게 만드는 건 일찍 세상을 뜬 부모에 대한 아픈 기억이었다.

심지어 그는 아빠가 엄마를 죽였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런 어느 날 폴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주민들 몰래 비밀정원을 키우고 있던 프루스트(앤르니) 부인을 알게 되고 허브차와 마들렌으로 이뤄진 그녀의 최면술을 통해 어릴 적 다정했던 엄마와 그렇지 못했던 아빠에 대한 기억들과 하나씩 마주하게 된다.

사실 폴의 삶은 부모가 세상을 뜨면서 다정했던 엄마와 그렇지 못했던 아빠의 기억으로 나뉜 채 멈춰 서 버렸다. 여기서 엄마는 행복을, 아빠는 고통을 각각 상징한다. 그렇게 폴은 서른셋의 나이를 먹도록 과거 속에서 살고 있었고 그의 행복과 고통도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있었다. 하지만 프루스트 부인을 만나 아직도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과거의 기억들을 하나씩 해부해가면서 비로소 현재와 마주하게 된다.

그러자 놀랍게도 과거의 아픈 기억들마저 추억으로 하나씩 변해갔다. 물론 절대 추억이 될 수 없을 정도의 아픈 기억도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프루스트 부인은 이렇게 조언했다. “나쁜 기억은 행복의 홍수 밑으로 보내 버려. 수도꼭지를 트는 일은 네 몫이란다.” 현재의 행복을 통해 과거의 아픔을 씻어 내라는 뜻이다. 실제로 폴은 그렇게 한다.

현재의 행복? 그건 사랑이었고 폴은 부모가 세상을 뜬 후에도 두 이모를 비롯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늘 사랑받고 있었지만 과거에 갇혀 몰랐던 거다.

물론 현재에도 고통은 존재한다. 하지만 현재의 고통은 지금 이 순간 계속 과거가 되고 있다. 그렇게 현재는 미래를 태워 과거를 생산하는 공장 같은 것. 또 그 공장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왜 많이들 하는 말 있지 않는가.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니 어차피 지나가는 거 비록 지금의 힘든 일에도 웃음을 보일 줄 아는 여유를 찾는다면 아픈 기억도 추억으로 좀 더 빨리 숙성되지 않을까.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장면은 늘 겁에 질려 있는 폴의 입가에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웃음이 고이기 시작하는 것. 그 웃음으로 인해 폴의 아픈 기억들도 비로소 추억으로 변해간다.

그렇게 웃음은 추억의 효소 같은것. 이런 격언도 있지 않는가.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야 행복해진다’

2016년 10월27일 재개봉. 러닝타임 106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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