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와 냄새
향기와 냄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6.17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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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교정에 라일락과 배롱나무가 있었다. 라일락은 봄에 꽃이 피지만 백일홍으로도 불리는 배롱나무는 한여름에 꽃이 핀다. 연보라색 라일락은 매혹적인 향기가 일품이다.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교정을 나설 때 서늘한 밤공기를 감싸고도는 라일락 향기를 거부할 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백일 동안 피고지기를 반복하는 배롱나무 꽃은 더위에 익어서인지 더욱 빨간 자태로 우리에게 한여름의 선물로 다가온다. 배롱나무는 향기도 더위에 눌렸는지 라일락에 비하면 너무 연하다.

우리는 흔히 꽃냄새나 향처럼 좋은 냄새를 ‘향기’라 하고, 좀 더 넓은 의미로 후각에서 감지되는 모든 화학적 향을 ‘냄새’라 한다. 어찌 보면 후각과 미각은 화학적 반응에 의한 뇌의 기억이다. 이러한 인체의 신비를 생물화학적으로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후각은 오랜 잔상으로 남는다.

식물이나 동물의 부패한 냄새, 공해물질의 주성분인 화학물질의 방향성, 먼지의 매캐함을 향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래서 넓은 의미의 후각에서 향기는 부분집합이라 할 수 있다.

며칠 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냄새의 추억이었다. 계층 간에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냄새로 잘 표현한 것 같았다. 그러기에 광의의 냄새가 오래도록 스물 스물 나는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후각에 민감한 편이다. 열심히 일한 뒤에 나는 땀 냄새인지, 위장을 위한 크림 냄새인지, 삶의 열정과 보람이 묻어있는 향기인지가 궁금하다. 머리에는 샴푸 향기, 옷에는 섬유유연제 향기만 잔뜩 날리고 있지는 않은지, 냄새의 추억이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라일락 향기가 조금 지나면 나는 장미향, 가을의 국화향, 한겨울의 풍란향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머릿속에 그 진한 기억이 새록새록 그대로 떠오른다. 그래서 첫 향도 중요하다. 사람과의 첫 만남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상과 언행과 냄새의 품위가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 또한 쉽게 속을 수가 있다. 인공의 향기인 향수는 사람마다 좋아하는 종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호손의 소설 ‘큰 바위 얼굴’처럼 대부분의 사람은 냄새보다 향기를 좋아한다. 좋은 것을 닮아가려는 속성 때문일 것이다. 주위에 좋은 향기가 있으면 그 향기가 있는 곳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방향을 바꾸어가며 자리를 옮기려고 할 것이다.

시대가 참 많이 지났다. 반려견의 똥 냄새는 거부감이 없으면서도 요양원에 모신 부모님의 변 냄새는 맡으려고 하지도 않으니…. 부끄러운 나와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렇다. 향기로운 냄새를 다 맡아 보지도 못할 만큼 우리의 일상은 바쁘고, 새로운 향기는 계속 개발되고 있다. 들꽃도 제각기 꽃모양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고, 향도 다르다. 식물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다. 그러나 사람은 단순히 생김새와 피부색으로만 분류할 수 없다. 성격도 모두 다른 향을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생선 냄새도 시내버스에서 나면 역겹지만 일식집이나 어항의 공판장에서는 신선한 냄새로 기억된다. 그리고 우리는 운동하기 위한 장소와 노동하기 위한 출근복에 향수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장소와 상황에 따라 냄새와 향기는 엄연히 다르게 적용되고 기억되기 때문이다.

교정의 라일락 향기와 꽃다발의 장미향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앞으로 어떤 향기를 맡으며 어떤 향기를 남겨야 할까? 늦은 저녁 선선한 밤공기에 묻어나는 들꽃 향이 문득 나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돌리게 한다.

우항수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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