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비운의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4.23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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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독립운동가가 우리들 곁으로 돌아오고 있다. 독립선언서 내용을 릴레이식으로 이어가는 일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올해에 기미독립의거 100주년과 더불어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을 맞은 것은 독립운동가의 헌신과 희생 덕분이다. 분연히 일어난 구한말 의병들과 광복을 맞기까지 거룩하고도 아름다운 역사를 써주신 조상님들이 고맙고 또 고맙다. 6·25 때 공산당으로부터 이 땅을 지켜냈던 선열들도 참으로 고귀하다. 이런 바탕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음에 국가가 이분들의 공훈에 보답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광복에서 6·25 전쟁까지 민간인들의 죽임이 너무 많았다. 화순탄광사건, 여순사건, 제주4·3사건, 보도연맹사건, 거창신원면사건 등의 집단희생이 그것이다. 정치이념이 다른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면서 각기 단독정부 수립을 조종한 것이 원죄다. 북쪽의 공산화 전략은 명확해졌고, 남쪽마저 적화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미국이 용납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한반도에서 사상의 자유가 허용된 것은 광복 이후 미군정 시절까지가 유일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8선 이남의 땅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설 땅은 좁아들고 있었다. 해방정국에서 여운형, 송진우, 김구 같은 독립운동가가 암살당했다. 학암 이관술도 그래서 비운의 독립운동가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추앙받고 있지만 그의 이름은 지금도 금기어에 가깝다. 그에게 ‘조선정판사 위폐범’이라는 올가미가 씌워진 것이 1946년 5월이었는데, 그의 반론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함께 잘사는 세상을 꿈꾸던 그는 미군정에 의해 파렴치한 위폐범으로 내몰렸고, 남쪽의 조선공산당은 김일성 중심의 조선노동당에게조차 핍박받았다.

이관술의 아버지는 아들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의 조부 이석도는 한때 울릉도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902년에 첫손자를 얻었다. 1905년경에 다시 울릉도로 가기 전에 살았던 울산 입암리로 돌아왔다. 5년 후 1910년 8월에 조선이 사라졌다. 일본제국의 침략 앞에 봉건왕조가 맥없이 무너진 것이다. 아버지 이종락은 아들이 총명하고 담대한 기질을 보이자 걱정이 앞섰다. 조부에게 서당교육을 받은 이관술은 결혼한 지 4년이 지난 22살에 중동고보에 입학했다. 신지식을 배워도 가정을 가졌으니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신학문에 매료된 학암은 1925년 1월에 관부연락선을 탔다. 최고의 수재들만 허용하는 동경고등사범에 입학한 것이다. 졸업 후 그는 민족주의 색체가 강했던 천도교재단의 동덕여고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1929년 가을,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번지면서 경성 소재 여학교가 매우 적극적이었다. 전국에서 159개교에 5만4천명이 참여했는데, 600여명의 퇴학과 2천500여명의 무기정학에 1천600여명이 구속되었다. 이 운동에서 민족주의자들이 학생 시위를 만류하거나 징계에 나서자 다수 사람들은 사회주의 노선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관술도 사회주의자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민족주의자들의 태도에 실망하면서 여학생들의 만세운동에 성원을 보냈다. 일제는 제국주의 타도를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자들을 허용하지 않았다. 특히 노동운동을 통한 계급투쟁을 철저하게 금지했다. 한편 조선 지식인들은 민족 차별과 열악한 상황에 놓인 노동자들의 편이 되어 항일 투쟁 강도를 높여나갔다. 무장투쟁뿐만 아니라 노동운동도 독립운동의 한 축이 된 것이다. 학암도 그 중의 일원으로서 사회주의가 일제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1932년에 ‘조선자주독립선언 10개조’를 발표했다. 유족들이 국가기록물 보관소에서 찾아낸 ‘이관술 가출옥 관계서류’에 나타난 선언 조항은 가히 혁명적이다. ‘조선어 본위교육 시행,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수업료 감면, 농민들에 의한 수리조합 운영, 국유림을 조선농민들에게 분배, 구속된 조선인 애국자 석방, 조선 주둔 일본헌병 철수, 중국 파견 일본함대 철수’ 등이 그것이다. 일제는 학암의 이런 주장을 감추고 치안유지법 위반이나 반제국주의 동맹 결성, 경성콤그룹 결성 등 좌익 활동만 내세워 그를 범죄시하며 옥죄었다.

학암 이관술의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그는 1932년에는 반제동맹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43년에는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지만 기쁨도 잠시, 조선정판사 위폐범으로 내몰렸다. 교육선구자로, 노동운동가로, 항일운동가로 치열했던 그의 삶을 모두 앗아가 버린 사건이었다. 고뇌에 찼던 식민지 지식인의 길이 무척 안타깝다. 그가 사회주의자였다는 이유로 파렴치한 위폐범으로 낙인찍은 정국 역시 아쉽다. 이런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을 빨갱이로 조롱할 권리는 이제 소멸되어야 한다.

이정호 수필가·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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