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1919년이었을까?
왜 1919년이었을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9.01.17 23: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산책에서 1919년에 3·1의거가 일어나고 대한민국 헌법을 발포하면서 임시정부를 수립했고, 올해가 그 100주년이 되는 해라는 것을 살펴봤다. 그런데, 왜 1919년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당시 우리 조상들의 인식을 훑어보는 것은 역사인식에 중요할 것 같아 간단히 산책해 본다.

이 연도는 대한제국의 황제와 관련이 있다.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12일에 세워졌으나 1905년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07년 7월 20일에는 광무황제가 강제로 양위를 당했으며, 7월 24일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일제의 한국통감의 지도를 받는다’는 정미 7조약이 체결되면서 내정조차 일제가 장악한 다음, 8월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우리 군대를 해산시켰다.

1907년 양위의 배경은 이렇다. 광무황제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을 빌미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물러나라고 협박을 했으나 듣지 않자, 이완용과 송병준 등 친일파 대신들을 활용하여 3차의 어전회의를 통해 황제위에서 물러나도록 위협과 압박을 가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7월 19일 물러날 결심을 했고, 이런 소식이 퍼지자 7월 20일 아침에 이완용의 집을 불태우는 등 전국 각지에서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으나 7월 20일 이완용이 양위식을 강행했다.

그런 후 1910년 8월 22일 서울 거리에 15간마다 일본 헌병들을 배치해 놓고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회의를 개최하고, 이른바 한일병합이란 안건을 이완용 내각이 결의하는 형식을 갖추어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이처럼 광무황제의 양위로부터 한일병합까지의 모든 조약과 조치는 처음부터 불법이었으므로 무효다. 먼저, 1905년 11월에 체결된 을사5조약이 황제의 승인과 비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 일제의 통감 및 통감부가 주체가 되어 행한 모든 정책과 정미 7조약 등도 모두 효력을 상실하는 게 마땅하다.

그리고 한일병합조약도 한국 황제 및 정부의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협박 하에서 강요되어 체결된 것이므로 당연히 무효다.

이런 사실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체결 때 그 제2조에서 ‘1910년 8월 22일 또는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한 데서도 확인된다.

이렇게 고종은 퇴위 상태였지만, 1909년 10월까지 외국에 보낸 친서에 황제의 국새였던 ‘황제어새(皇帝御璽)’가 사용되었으며, 1914년 12월 독일 황제에게 보낸 친서 말미에 ‘내가 쓰는 국새를 빼앗겨 내 호(號)를 새긴 도장을 쓸 수밖에 없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질적인 대한제국의 황제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덕수궁 함녕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선총독부는 1월 22일 ‘뇌일혈로 숨을 거뒀다’고 공식 발표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1차 세계대전 마무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의에 의친왕과 하란사를 밀사로 파견하여 황실의 독립의지를 알리려고 한 것’이 조선총독부에 알려져 이를 막으려고 독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처럼 광무황제가 1907년에 강제 퇴위되고, 대한제국은 1910년에 일본에 병탄되어 교과서에서는 1910년 이후를 ‘일제강점기’ ‘일제식민지시대’ ‘일제시대’ 등으로 부르고 있지만, 당시 광무황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대한제국의 황제로서 활동했고, 대부분의 백성들도 대한제국 시대가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가 사망하여 그것이 모두 끝나게 됨으로써 새로운 나라의 건국이 필요하게 되었다.

1910년에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탄되었는데도 바로 독립선언과 3·1독립만세의거가 일어나지 않고 9년 후에 일어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 박정학 역사학박사·사단법인 한배달 이사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