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삶과 역사에 끼어들다-‘마약왕’
마약, 삶과 역사에 끼어들다-‘마약왕’
  • 이상길 기자
  • 승인 2018.12.27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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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약왕' 한 장면.
영화 '마약왕' 한 장면.

‘취하다’라는 단어가 있다. ‘가지다’는 뜻이 아니다. 무언가에 빠져들 때의 그 ‘취하다’이다. 일상에서는 술이나 약과 결부지어 자주 쓰인다. 아주 평범한 단어다. 꿈이나 행복, 사랑, 소망, 희망 등등. 우리가 평소 아름답게 생각하는 단어들에선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런데 이 ‘취하다’는 단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지는 어른이 되면 안다. 다시 말해 꿈이나 희망보다 그 단어에 주로 휘둘려 살게 된다는 말이다. 솔직히 어렸을 땐 이 단어를 쓸 일이 별로 없다. 어린 나이에 술 마실 일도 없고, 감기약에 취해 잠이 들었다 해도 그게 그런 줄도 모르기 십상이다. 그랬던 사람이 학교라는 울타리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서서히 취하기 시작한다. 물론 자신이 무엇에 취해가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아니 그게 취한다는 의미와 어울리는지 자체도 모를 터. 그래서 지금부터 한번 짚어주겠다. 우리가 얼마나 취해서 사는지. 

의식주 본능을 제외하면 평생 동안 우리는 성공에 취해 산다. 학교 다닐 땐 등수, 사회에 나와서는 권력이나 명예, 혹은 대박에 목을 맨다. 물론 1등이나 권력, 명예, 대박을 쳐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다수라서 성공보다는 그것을 이루려는 ‘욕망’에 취해 산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반면 소수의 해본 사람들은 안다. 그게 얼마나 달콤한지. 한 번 맛보면 벗어나기 힘들다. 취할 수밖에 없다. 

종목이 다른 걸로 평범한 어른이 자주 취하는 게 두 개 더 있다. 바로 술과 사랑. 어쩔 수 없이 마시는 술도 있겠지만 주당들에게 술은 거의 마약이다. 벗어나기 어렵다. 또 사랑은 그게 정신적인 것이든, 육체적인 것이든 중독성이 어마어마하다. 사랑에 취해버리면 반드시 고통을 각오해야 한다. 이제 정리해보자. 1등, 권력, 명예, 대박, 술 그리고 사랑. 평생 우리가 취해 사는 것들인데 이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된 속성으로 묶을 수가 있다. 바로 즐거움이나 행복, 그러니까 철학적으로는 ‘쾌락’이란 단어로 카테고리를 만들 수가 있다. 다들 즐겁거나 행복하기 위해 살잖아. 철학의 한 사조로 ‘쾌락주의’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랬거나 말거나 쾌락의 끝판왕은 역시나 마약. 우민호 감독의 신작 <마약왕>에서 ‘마약왕’이라는 제목이 담고 있는 함의는 이렇듯 깊다. 

사실 <마약왕>에서는 앞서 언급한 우리가 취해 사는 것들이 주인공 두삼(송강호)을 통해 모두 그려진다. 아마 영화를 본 사람들은 공감할 거다. 하지만 우민호 감독은 개인의 삶을 넘어 역사의 현장으로까지 마약을 투하한다. 아시다시피 영화는 70년대 마약왕이었던 ‘이황순’이라는 실존인물을 모티프로 만들어졌고, 박정희 유신 정권의 비호 하에 마약왕 이황순을 필두로 이 나라의 마약사업이 크게 성장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는 그 과정을 그려나가면서 흥망성쇠의 궤를 같이 했던 주인공 두삼과 유신정권을 오버랩시킨다. 쉽게 말해 두삼이 약에 취해 있을 때 유신정권은 권력에 취해 있었던 거다. 그리고는 비슷한 시기에 함께 최후를 맞이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두삼은 자주 아내인 숙경(김소진)에게 말했다. “육영수 여사처럼 만들어주겠다”고. 그 시절 박정희가 권력의 왕이었다면 두삼은 마약왕이었던 거다. 

허나 더 눈여겨봐야 할 건, 마지막에 약에 취해 두삼이 내뱉는 대사.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는 내가 다 먹여 살렸다”고. 박정희 정권의 경제부흥 신화에는 사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반론도 있다. ‘프레이저 보고서’라고 1978년 10월 31일 미국 하원이 발간한 보고서에 보면 대한민국의 경제를 발전시킨 건 미국 케네디 정부라고 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공산화가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한 당시 케네디 정부가 한국경제에 깊이 개입해 ‘수출수도형 국가’로 변모시켰다는 것. 자세한 내용은 유튜브에 ‘백년전쟁’이라고 쳐보시길. 결국 영화는 당돌하게도 약에 취하듯 박정희 경제부흥신화에 취해 있는 국민들에게 깨어나라는 메시지까지 담고 있는 셈이다. 전작인 <내부자들>에서도 그랬지만 내 장담하는데 우민호 감독은 분명 시쳇말로 좌파일 거다. 

이제 다시 개인의 삶으로 돌아가자. 어른이 되면 삶이 힘들어지는 게 쾌락 빼고는 신기할 게 별로 없다는 거다. 성공은 멀기만 하고 불법적인 마약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들 술과 섹스에 빠져 산다. 며칠 전은 크리스마스였다. 어렸을 땐 성탄절이 다가오면 한 달 전부터 행복했는데 이젠 그게 안 된다. 너무 익숙해서. 때문에 <마약왕>에서 두삼을 비롯해 쾌락에 집착해 망가져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는 ‘그 시절이 그립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더랬다. 

2018년 12월 19일 개봉. 러닝타임 139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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