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벌 혹은 그 이상
두 벌 혹은 그 이상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0.16 22: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근한 이불이 생각나는 이즈음 해야 할 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옷장을 정리하는 일이다. 대개 한가위 전에 마쳤을 일인에 올해는 더위가 오랫동안 머물러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옷장에 가지런히 걸린 옷가지를 이리저리 살핀다. 두 벌인 몇 개의 옷이 눈에 띈다. 사이즈도 색깔도 디자인도 똑같은 옷이다. 앞판에 사슬과 꽃무늬가 들어간 초록빛 니트도 두 벌이고, 빨간 입술이 찍힌 검정 티셔츠도 두 벌이고, 목까지 올라오는 주황빛 니트도 두 개 나란히 걸렸다. 이 외에 디자인이 똑같지만 앞 판 색깔이 다른 호피 무늬 티셔츠, 같은 브랜드에서 나온 앙상블 세트는 자그마치 세 벌이다. 또한, 앞과 소매는 마 원단이고 뒤판은 부들부들한 폴리에스터 재질인 블라우스는 주황빛, 콜드블루, 커피색, 짙은 회색 따위 색깔별로 여러 벌이 가지런하다. 그림을 그리는 누군가와 작고한 유명 디자이너도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여러 벌 쟁여두고 번갈아 입었다던데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같은 옷이 꽤 여러 벌 있는 편이다. 이 버릇이 든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요즘은 거의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을 산다. 온라인이다 보니 입어보고 살 수 없다. 배송을 받아보고 나서야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를 챈다. 그러다 보니 입어 본 상표나 디자인, 같은 재질의 옷을 고르는 일이 잦다. 비슷한 형태의 옷들 중에서도 각 브랜드에 따라 사이즈나 형태, 재질 따위가 다르다 보니 더 그렇다. 수많은 디자인과 상표 중에 고른 제품이 내 몸과 마음에 들면 기억했다가 그 브랜드의 옷을 다음에도 찾는다. 입어보고 사지 않아도 대부분 맞으니 검증되었다고나 할까, 샀던 곳에서 다시 사는 편이다. 그러다가 예전에 샀던 옷 중에 정말 마음에도 들고 입기에도 편한 옷이 떨이하듯 마감 세일을 하는 날에는 하나 더 사고 싶은 마음을 떨치지 못한다. 마트에서 덤을 얹어 파는 상품처럼 보여 사지 않고는 못 배긴다. 어떨 때는 횡재하는 느낌마저 든다. 이런 유혹에 못 이기거나 유용성을 따져 산 옷이 대부분 두 벌인 것이다.

옷장 정리를 하다 보면 계절이 다 가도록 한 번도 입지 않고 그대로 정리 절차에 들어가는 옷이 많다. 여름엔 에어컨 바람 때문에 긴 팔을, 겨울엔 과도한 난방으로 짧은 소매 옷을 입는 따위의, 철에 맞게 입지 않는 세태 탓도 있지만, 쇼핑이 편해진 까닭도 있으리라. 인터넷에서 팔지 않는 것이 없고 클릭 몇 번과 간편 결제로 상품 대부분을 사다 보니 더 그럴 것이다. 언젠가부터 인터넷 세상은 한 번이라도 쇼핑몰에 다녀오면 다른 페이지를 열어도 이 페이지를 오기 전에 내가 검색하고 살펴봤던 물품의 사진이 홈페이지 여백에 빼곡하게 들어찬다. 그럴 때면 내 행동과 취향이 누군가에게 감시라도 당하는 양 무섭다.

귀신같이 내 취향을 알아채는 기술은 더 발달될 것임이 틀림없다. ‘견물생심’은 인터넷 세상에도 통하는 사자성어이지 싶다. 그러니 필요하지 않고 한 번도 입지 않고 사용하지 않는 상품들이 집마다 얼마나 많을까. 홈쇼핑 방송까지 합치면 그 양은 더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꼭 필요한 물품이 꼭 필요한 곳에 쓰이는 날은 아마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신문 기사를 한 꼭지 읽으려 해도 주변에는 어김없이 배너 광고, 섬네일 광고, 문자 광고가 가득하다. 또한, 지역 신문의 기사를 클릭해서 읽고 백스페이스를 누르면 어김없이 광고 페이지로 연결된다. 처음에는 잘못 누른 줄 알고 당황했지만 그런 상황이 되풀이되다 보니 요즘엔 으레 두 번 연속 클릭으로 신문 홈페이지를 찾아가는 실정이다.

어느 인터넷 쇼핑몰의 캐치프레이즈는 ‘사는 게 즐겁다’이다. 얼핏 한 번 읽으면 사는 것이 삶을 뜻하는지, 구매행위를 말함인지 혹은 둘 다를 포함하는 문장인지 분명치 않다. 시시하고 유치한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이 문구야말로 작금의 세태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문장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광고 문구는 그 시대를 사는 이들의 행태를 가장 잘 짚어내는 잣대가 아니던가. 우리는 바야흐로 사는 게 즐거운 시대에 사는 것이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쉼 없이 팔고, 죽을 때까지 소비하고, 두 벌, 세 켤레, 다섯 상자, 열 묶음, 백 두름이 될 때까지 재어놓는 인생의 종말은 어디일까.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이제부터는 똑같은 옷을 사지 않으리.

박기눙 소설가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