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에도 예절이 필요할까?
토론에도 예절이 필요할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10.07 2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애에도 기술이 필요할까? 정답은 “필요하다”이다. ‘연애의 기술’이란 말이 책이름, 영화이름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기술(Technology)의 경지가 깊어지면 예술(Art)의 경지로 승화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Art of Love’란 말을 ‘사랑의 미학’이란 고상한 의미로 분장하기를 즐긴다.

그렇다면 대화에도 기술이 필요할까? 정답은 속된말로 “당근”이다. 하지만 6·25 이전 세대들과는 거리가 멀다. 밥상머리에서도, 책상머리에서도 ‘대화의 기술’이라곤 손톱만큼도 배운 적이 없는 탓이다. 한반도 남쪽에서는 경상도 사람들이 특히 심하고, 한반도 전체로 따지면 남녘 사람들이 훨씬 심하다. 그런 기술이 없어도 먹고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어서일까? 그리고 우리말의 비논리성은 주어, 목적어, 술어의 순서를 아무리 바꾸어 놓아도 의미가 다 통하는 우리말의 특이성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대화의 기술은 정말 필요한가? 결과론이지만, 그 답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모처럼 생겼다. 지난 2일 오후 2시 울산시의회 대회의실에서 전을 편 ‘제52회 처용문화제 기념 학술심포지엄’이 바로 그런 기회였다. 이 자리에서 ‘대화 기술’, ‘대화 예절’의 부재를 실감나게 만든 주역들이 있었다. 심포지엄의 좌장 격인 울산대 연구교수 S씨와 안동대 민속학과 명예교수 L씨, 그리고 ‘울산OO연구소’ 소장 J씨가 바로 그들….

첫 포문은 1주제 발제자인 L교수의 주장을 S교수가 맞받아치면서 열렸다. 자신을 ‘역사학자’라고 소개한 S교수는 민속학을 전공한 L교수의 지론을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그러자 L교수가 ‘당치 않은 말’이라며 S교수의 말을 되받아쳤다. 앞서 L교수는 ‘처용설화의 재인식과 처용춤의 문화자산 가치’라는 주제 발표를 통해 ‘처용’이 동해용을 섬기는 개운포 지역 무당의 일곱 아들 중 한 명이라는 지론을 폈다.

두 사람 사이의 반목은 다음 진행순서 때문에 그대로 묻히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종합토론 시간에 객석의 J소장이 날린 직격탄이 L교수의 심기를 아프게 건드리면서 원색적 설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J소장은 처용설화의 주인공을 아랍인, 지방토호의 아들, 굿쟁이 운운하는 것은 처용을 폄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삼국유사를 제대로 이해하면 처용의 부인이 간통을 당한 것이 아니며, 역신은 역병 즉 천연두이고, 이 역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잘난 얼굴이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예정시간을 훨씬 넘긴 심포지엄은 그러나 설전 당사자들을 화해의 장으로 이끄는 데는 끝내 실패하고 만다. 두 차례에 걸친 원색적 설전의 이유는?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뭐니 해도 밥상머리·책상머리 교육의 부재가 그 첫째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토론문화에 익숙한 유럽에서였다면 이처럼 민망스러운 장면이 연출됐을 것인가? 그 다음은 “나의 학설이 유일한 정설”이라는 식의 ‘아집’과 상대방의 지론을 애써 무시하려는 ‘독선’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울산 지역사회만 두고 보더라도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온갖 설들이 ‘처용춤’처럼 난무한다. 처용이 아랍 상인이라는 설, 아랍 뱃사람들을 따라나선 아랍 의사라는 설, 처용은 ‘불륜(외설)’과 ‘야합’의 성격이 더 강하므로 처용문화제 이름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 등등… 그야말로 소화불량에 걸릴 정도다. 심포지엄을 주관한 울산문화재단 관계자도 처용 주제 연구논문만 1천 건이 넘는다고 했다.

국문학자 김열규 교수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 경지면 처용의 호적 찾기나 정체성의 단일성 추적은 포기해야 한다. 처용을 단색, 단형으로 몰아붙이면 그것은 필경 소경 코끼리 만지기나 진 배 없게 된다. 코를 알아맞춘 사람이 다리 알아맞춘 사람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다.”

김정주논설실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