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 자네 고향은 어딘가?
처용, 자네 고향은 어딘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9.30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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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초대 문화부장관 앙드레 말로는 프랑스의 위대한 예술을 파리 시민에게만 보이는 것은 비민주적이라 생각했다. 그는 위대한 프랑스 예술을 지방 시민도 볼 수 있도록 지방마다 문화의 집을 지었다. 말로는 지방 시민들이 몰려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말로의 기대와는 달리 지역 주민들은 문화의 집에 오지 않았고, 반대로 지역 유지들만 몇몇 모여 그들만의 구락부가 되었다. 말로의 공급 정책은 오히려 양극화만 초래했다. 말로는 “나에게 좋으면 그들도 좋아할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처럼 과거 근대 산업시대, 즉 모더니즘 미학에서는 엘리트 작가(작품)는 공급하고 시민대중은 구경하는 역할을 구분했다. 우리나라 축제 역시 그러하다. 주최 측이 일방적으로 공급하는 축제는 시민들을 구경꾼으로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축제의 평가도 구경꾼의 숫자로 했고, 다시 시민들은 동원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동원을 위한 축제는 미인대회와 지역특산물을 연계하거나(사과아가씨, 배꽃아가씨 등), 인기연예인 초청공연 등 볼거리에 집중했다.

동원을 위한 볼거리 축제는 마치 축제의 피날레로 일반화된 불꽃놀이처럼, 짧은 순간의 황홀한 환상을 위해, 현실의 고단함과 개혁 욕구마저 한줌의 재로 사라져 버리게 되는, 예술이 삶의 망각을 이끄는 환각제가 된다. 그래서 동원과 공급은 쌍둥이다. 처용문화제 역시 기업체와 학생을 동원해서 매스게임과 퍼레이드를 했다. 처용문화제로 개칭한 후에도 월드뮤직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시민들이 보라’고 공급했다.

이제 지역문화가 도시경쟁력이 되는 시대가 왔다. 그런데 아직도 울산의 많은 분들이 지역문화의 본뜻을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 대표적인 오해가 바로 콘텐츠 맹신주의다. 물론 지역문화를 대표하는 콘텐츠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물이다. 하지만 지역문화의 요체는 지역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 사람이다. 지역문화란 공동체의 구성원이 오랜 역사와 이야기 속에서 공유된 생각과 행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역의 독특한 콘텐츠는 지역민에 의해 나왔고, 앞으로도 지역민의 집단적 창의성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처용문화제도 이제는 시민의 손으로 만드는 창의적 축제가 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의 의지는 ‘관심(욕구, interest)’을 전제로 생긴다. 따라서 자발적 참여는 곧 관심 해결에 대한 기대를 주어야 이루어진다.

이제는 ‘보는 축제’가 아니라 ‘하는 축제’가 되고 있다. 처용문화제도 보는 것에서 시민이 직접 처용이 되어 노래하고 춤추는 해방노래, 해방춤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축제에 일상 탈출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상이든, 정치이든, 종교이든, 취업이든, 결혼이든… 자유를 가로막는 금제(禁制)는 모두 걷어치워야 한다. 또한 처용무를 궁중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궁중춤이 되면서부터 민초들은 자신의 춤을 빼앗기고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당장이라도 처용을 울산으로 데려와야 한다. 천 년 전에 울산 곳곳에서 그랬듯이 울산시민은 부정과 불의에 맞서는 신명난 처용놀음을 기대한다.



이강민 울산미학연구소 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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