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중구 문화의 전당’에서 만나다
아버지를 ‘중구 문화의 전당’에서 만나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9.16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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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오후, 울산 중구 문화의 전당에서 뜻밖에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흥겨운 경상도 덧배기 장단에 한껏 도취되어 춤을 추고 계셨다. 추시는 춤은 양산학춤. 학이 먹이를 찾으러 걸어가다가 짝을 발견하는 순간의 춤사위였다.

아버지의 힘찬 춤사위는 소리로 치면 절창(絶唱)의 순간이다.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긴 목에서 크게 울려 퍼지는 학의 울음소리다. 머리에는 입영(笠纓=갓의 장식 끈)의 갓을 쓰시고, 가슴에는 붉은 홍띠를 매시고, 허리춤에는 안경집과 남색주머니를 차셨다. 오른쪽 다리는 발돋움하여 중심을 잡고, 왼쪽 다리는 한껏 올려 버선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힘찬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이다.

가까이 다가가니 아들을 언제 보셨는지 획 돌아보고 웃으시면서 “그래, 왔나” 하셨다. 이윽고 아버지는 학이 되어 허공으로 날아갔다. 춤이 끝났다. 70대 중반의 농익고 여유로운 춤사위는 많은 관람객으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를 연이어 받았다.

아버지 학산 김덕명(金德明·1924∼2015)은 한량무(경상남도지정무형문화제 제3호) 보유자이자 양산학춤 계승자이시다. 평양 예기였던 김농주(金弄珠), 고성오광대 박흥도(1906∼1998·문둥이 역), 화성재인청 이동안(李東安·1906∼1995), 이주서, 고수길, 서상권으로부터 춤을 배웠다. 고성오광대 조용배(趙鏞培·1929∼1991·승려 역)·허종복(許宗福·1930∼1995)과도 교유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대면에서는 언제나 아버지가 먼저 반기셨다.

“울산 중구 문화의 전당이 2018 기획전시 ‘찰나·동행’ 춤 아카이브 사진전을 1층 별빛마루에서 마련한다. 전시는 오는 30일까지.”(경상일보.2018.9.3.) 행사 정보에 어두워 개장 행사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다음날 전시장을 찾았다. 이매방, 강선영, 정재만, 임이조, 김수악, 문장원… 모두 생전에 인사를 드렸던 분들이라 마음이 숙연했다.

안내자가 묻지도 않는데 말을 꺼냈다. “저기 저 사진이 내 아버지입니다.” “그래요?” 안내자는 내 말을 듣고는 황급히 누군가를 찾았다. “저기 저 사진이 저분 아버지 사진이랍니다.” 그러자 안경 낀 남자분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제가 저 사진을 찍은 사람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기억납니다. 아버지를 빼닮으셨군요. 김덕명 선생님께서 아들이 춤추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아들이 울산에서 활동을 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대를 이어 아들이 춤춘다는 말을 무던히도 자제하시던 아버지였지만 이곳저곳,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자식자랑을 꽤나 하신 모양이다. 아버지의 춤사위는 묻지도 않았는데 사진작가가 이렇게 설명했다. “학이 먹이를 찾고 다른 장소로 걸어가서 마지막으로 사랑태에 들어가기 직전입니다. 굿거리장단의 하나, 둘, 셋, 넷에서 ‘셋’에 해당하는 순간을 포착했군요. 저 왼쪽다리가 땅을 짚으면 한가락 보내고 날개를 펴고 오른쪽, 왼쪽으로 번갈아 도는 춤사위가 연결됩니다. 이렇게요…”

어제 일요일, 전시장을 다시 찾았을 때 넓은 공간이 황량해 보였지만 자식의 마음은 기쁨으로 설Ž 아버지는 장남의 여성스러운 심성과 행동, 차남의 속정과 매몰찬 겉행동과 억센 고집을 모두 인정하셨다.

1959년, 일곱 살이었던 내가 경험한 추석은 특별했다. 자다가 방에 물이 차오르자 나는 아버지의 넓고 따뜻한 등에 업혀 물찬 마당을 지나 담벼락으로 옮겨졌다. 사라호 태풍으로 추석 아침은 피난장소인 초등학교 교실에서 동네 사람과 함께 맞았다. (사라호 태풍·Typhoon Sara=1959년 9월 11일 사이판 섬 동쪽 해상에서 발생한 제14호 태풍. 9월 15~18일 한국 남부와 중부 지방에 큰 피해를 입혔다. 사망·실종 849명, 부상 2천533명, 이재민 37만3천459명 등 많은 피해가 났다.)

1966년, “너거 아버지 춤쟁이고, 한량이라카데.” “누가 그라더노?” “누가 그라긴. 동네 아아들이 다 아는데, 밤낮주알로 장구소리 나는 기 이 동네에서 너거 집 말고 또 있나?”라는 말이 싫지는 않았다. “니는 빙신이가? 와 이것도 따라 못하노?” “희안하제, 남들은 잘도 따라하는데.”, “치아뿌라!” 경상도 사투리가 유난히도 심했던 아버지로부터 나는 이런 소리를 밥 먹듯 들으면서 여러 가지 춤을 배웠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최고의 스승이었고, 항상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1973년, 의논 없이 공부하기 싫다고 휴학하고 속 태우던 자식이 부모형제자매 모르게 공군에 지원했다. 꼭두새벽에 훈련소로 간다며 집 나서는 자식의 뒷전에다 대고 “모진 놈”이라 넋두리하시면서 매몰차게 방문을 닫으시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어느 날 ‘모진 놈’이 보고 싶어 무턱대고 신병훈련소로 찾아오셨다. 만나지도 못하는 아들을 곁에다 두고 낮에는 훈련장이 바라다 보이는 주점에서 막걸리 한 잔 앞에 놓고 이틀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다. 그랬던 아버지가 중구 문화의 전당으로 오셔서 이달 말일(30일)까지 양산학춤을 추신다.

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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