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社說)에 관하여
사설(社說)에 관하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1.16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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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대중매체가 신문 밖에 없을 때에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의 학생들은 사설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국어책에 신문사를 방문하는 견학기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신문은 누가 사설을 썼는지 밝히지 않는다. 글 쓴 사람 개인의 의견, 개인의 이야기(私說)가 아니라는 간접적 표현이다. 지금은 방송국에서도 신문의 사설과 같은 뉴스 비평, 정치 비평, 사회 비평, 문화 비평 등이 해설과 함께 시청자에게 제공된다. 해설자 얼굴이 화면에 나오니까 신문 사설이나 방송국 논평(해설)을 사설(私說)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때문에 대학 교육까지 받은 사람,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강의하는 교수들까지도 ‘신문사 논설위원한테는 함부로 말을 하면 사설로 깐다’고 한다. 필자를 아는 사람들이 필자를 대고 한 말이다. 이때의 사설은 社說인지 私說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사설(社說)은 시사성이 있는 해당 지역의 현안(懸案)문제를 신문사의 주장으로 펼치는 글이다. 그래서 영어로 사설은 editorial, 편집한 것, 원고를 손질한 것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 편집국 기자들의 회의를 거치며, 신문사의 발행 취지, 사시(社是)가 반영되고, 전문가 수준의 논리적 비평과 더불어 독자를 정론(正論)으로 이해시키려는 일종의 기사이다.

이래서 논술 시험공부 재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사설(私說)이 아니기 때문에 사설(社說)의 문장과 내용까지도 편집국에서 가필, 수정, 삭제 등을 한다. 다만 사설기사 말미에 이름을 밝힐 때에는 그 한 사람의 의견이어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 사람이 신문사의 명예를 걸고 책임을 진다는 묵계(?契)가 있기 마련이다. 이때는 편집국에서도 좀처럼 기사내용을 고치지 않는다. 누가 썼는지 이름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큰 실수였겠지만 신문의 사설에 大統領을 犬統領으로 써도 바꾸지 않은 일이 있었다(이승만 대통령이 개(개 견(犬)가 되어버렸다). 바로 이점 때문에 요즈음 각 신문에서는 일반 기사에서도 기사말미에 기자의 이름과 e-메일 주소를 달아 책임감 있는 기사라는 사실을 독자에게 알리며 다른 의견이 있거나 틀린 내용이 있으면 쉽게 기자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사설(私說)은 고생을 많이 한 사람들, 대개는 세속적 의미로 성공한 사람들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을 소설로 쓰면 열권도 넘을 것이다’의 사설이다. 물론 私說은 소설을 쓰는 기초 자료가 된다. 소설가 자신의 주관적 경험에 최대의 상상력, 최고의 창의력을 보태어 한 줌의 눈덩이(소설가의 아주 작은 체험)를 눈사람(동화)으로 만들기도 하고 눈사태(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일어나게도 하고 백년설(우리나라와 세계의 명작들)이 되기도 한다. 단편이건 장편이건 소설들은 私說에서 태어나 진화한 것이지만, 私說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독자에게 담담하게 다가가는 것이 수필이다.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을 수필로 쓴 글(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글)은 가히 세계적 명작이다. 피 선생님께서는 그 글을 수정하고 싶어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읽었기 때문에, 수필 같은 생각에서 고치지 못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황순원 선생님은 자신의 단편소설 ‘소나기’를 큰 줄거리는 놓아두고 작은 표현들을 계속해서 수정하셨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식견이 넓어지면서 자기 작품을 고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남이 자기 글을 고치면 화를 낸다. ‘왜 내 그림에 덧칠을 하느냐?’라며 무척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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