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釜林)사건’, 그 마침표
‘부림(釜林)사건’, 그 마침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9.02 20: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월의 마지막 날 오전, 다소 길어 보이는 문자메시지 한 통이 휴대전화로 날아들었다. 수년 전 부산서 서울로 이사 간 대학후배가 보내 온 것. 그의 과거를 수십 년간 기무사 요원처럼 지켜보아 온 필자로서는 메시지를 훑어 내리는 순간 감전이라도 된 듯 잠시 ‘동작 그만’ 자세를 취해야 했다.

앞부분은 ‘부림사건 37년 만에 무죄’라는 제목의 기사 같았다. “부산지법 제2형사부는 8월 30일, 영화 ‘변호인’으로 널리 알려진 세칭 ‘부림사건’의 관련자에 대한 재심(사실은 재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1981년 여름, 전두환 정권이 부산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활동가 20여 명을 제거하기 위해 불법으로 구금, 고문으로 조작하여 국가보안법 등 위반으로 구속한 사건이다. ‘통닭구이’라는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이라 하여 피해자들을 ‘통닭구이로 만든 공산주의자’라 부르기도 했다.”

뒤이은 문장은 후배가 지인들에게 전하는 자기선언이자 ‘부림사건’의 종언(終焉)을 알리는 마침표였다. “나는 이 사건으로 2년 넘게 수형(受刑)생활을 했다.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우리들은 어느덧 60대 중·후반의 나이가 될 때까지 긴 세월을 ‘공산주의자’란 멍에를 메고 온갖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다.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 백발이 다 된 동료들을 보며 가슴 아팠던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오랜 세월동안 고통을 함께 나눈 가족들과, 같이 투쟁한 여러분께 감사드린다.…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고도 험난할 것이다. 이 땅에 민주와 정의가 바로 설 때까지.”

‘백발’로 치자면 이 후배를 따를 만한 이가 사실은 없다. 부평초(浮萍草)처럼 혹은 낭인(浪人)처럼 떠돌아다니게 만든 세월이 그의 머리를 그처럼 새하얗게 채색해 놓은 것일까? 여하간 그의 생활은 겉으로 화려한 그의 고교 또는 대학 동기들과 비교할 때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자긍심 하나만은 늘 하늘을 찌를 만큼 강했다.

‘부림(釜林)사건’의 대강은 후배의 말처럼 영화 ‘변호인’에도 어느 정도 묘사되어 있다. ‘다음백과’의 이 대목 집필자는 부림사건을 이렇게 간추린다. “‘부산(釜山)의 학림(學林)사건’이라는 의미인 ‘부림사건’은 전두환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부산지역 지식인·교사·대학생 등을 체제전복 집단으로 조작해 19명이 구속된 5공화국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이다.…당시 이 사건 변론을 맡았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이는 2013년 개봉해 1천1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당시 검사는 최병국(전 국회의원)과 고영주(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등이었다.”

후배는 사건 연루자를 20여 명이라 했고 앞의 글에서는 구속인원을 19명이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나중에 집행유예로 풀려났거나 고인이 된 인사는 빠졌기 때문이다. 구속자 중엔 필자의 지인도 대여섯 명 있었다. 김재규(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설동일(전 진실화해위원회 사무처장), 김희욱(전 교사) 씨 등이 그들. 그들의 아지트는 당시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의 어느 허름한 가옥 2층에 차려놓은 ‘양서협동조합’이었다.

무죄 판결로 명예를 되찾은 대학후배는 5년 전(2013년)의 항고와 지난해의 대법원 재심판결을 거쳐 ‘공산주의자’란 주홍글씨를 마침내 벗을 수 있었다. 부산 K고교 25회 출신인 그는 문재인 대통령, 박맹우 국회의원(울산 남구을)과 고교 동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문 대통령과는 부산서 H신문 부산지사장-총무로 일하면서 우정을 두텁게 다진 것으로 전해진다. “마누라 그늘에 가려 인생을 손해 보며 살아간다”던 너털웃음의 백발도사. 그의 이름은 송세경(현 농협중앙회 이사), 그의 부인 이름은 구성애(성교육 전문가, ‘푸른 아우성’ 대표) 씨다.

김정주 논설실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