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자객처럼 수묵화처럼-‘자객 섭은낭’
사랑, 자객처럼 수묵화처럼-‘자객 섭은낭’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8.02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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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객 섭은낭' 한 장면.
영화 '자객 섭은낭' 한 장면.

 

때는 8세기 중엽. 중국 당(唐)나라 시절이었다. 국력이 갈수록 쇠퇴해지자 당 조정은 국경지역에 번진(藩鎭:군벌세력)을 설치하고 중앙을 방어하게 했다. 하지만 번진의 세력은 갈수록 강해져 조정에서도 통제하기가 힘들었는데, 그 중 가장 힘이 센 번진이 바로 ‘위박’이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자객 섭은낭>은 그 즈음 시작된다.

당시 위박을 다스리는 최고 사령관인 절도사는 전계안(장첸). 계안은 당나라 가성공주가 위박으로 시집온 뒤 양자로 들인 이였다. 원래 계안에게는 일찍이 정혼녀로 섭은낭(서기)이 있었지만 가성공주는 위박의 안위를 위해 그를 권세가였던 원씨 가문과 정략결혼을 시키고, 은낭은 자신의 쌍둥이 동생인 여도사에게 보내버린다.

이후 13년 동안 은낭은 여도사 밑에서 자객으로 길러진다. 그런 어느 날 여도사는 무예는 뛰어나지만 아직 마음이 여린 은낭을 단련시키기 위해 위박으로 돌아가 절도사인 계안을 암살하라는 명을 내린다.

결국 은낭은 위박으로 돌아가 한 때 사랑한 남자였던 계안에게 잠입하게 된다. 날카로운 검(劍)을 품 안에 숨긴 채.

사랑이란 게 그렇다. 검(劍)과 닮았다. 상처를 준다. 사랑을 알고 나면 누구나 손에 한 자루의 검이 주어지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또는 이젠 사랑을 받고 싶어 검을 휘두른다.

일찍이 사랑으로 상처받은 은낭이 자객이 된 건, 필시 그런 의미일 터. 검을 품은 채 계안에게 잠입했던 은낭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다시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을 테고, 혹여나 싶은 마음에 무공으로 강해진 자신을 그에게 드러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미에 가시가 달려 있듯 사랑도 원래 비수를 품고 있기 마련. 계안에게 들이댄 은낭의 비수는 그를 해치기 위함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그녀의 비수는 처음부터 그를 위해 존재했다. 장미의 가시가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듯. 그랬다. 은낭은 계안에게 잠입한 게 아니라 스며든 것이었다. 또 사랑은 언제나 자객처럼 조용히 스며든다. 죽을 지도 모른 채.

한 폭의 수묵화를 닮은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시종일관 조용히 화면을 채워가는 은낭의 절절한 마음에 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계안을 노려봐도 그 마음은 이미 무너져 있었고, 계안에게 닿을 듯 말 듯 흔들리는 검은 그를 향한 은낭의 애달픈 마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그것은 흡사 화선지에 먹이 스며드는 것과 같았다. 힘차지만 젖어있었다.

그건 계안도 마찬가지. 자객이 되어 돌아온 은낭을 첫눈에 알아본 그는, 지금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녀의 가슴 아픈 사연을 털어놓으며 미안함을 대신 전했다. 검이나 붓이나 휘두르는 건 매 한가지. 은낭이 휘젓고 간 검사위는 먹을 토해낸 붓처럼 화선지 같은 그의 마음에 깊숙이 스며들었을 것. 그 먹먹한 스며듬이 멈추는 순간, 비로소 한 폭의 그림이 완성된다. 사랑도 완성된다. 사랑을 지켜낸 뒤 은낭은 엷은 미소를 띄우며 신라로 떠난다. 그를 위해. 또 갖지 못해 완전한 사랑을 위해.

2016년 2월 4일 개봉. 러닝타임 106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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