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할 수 있어 아름다운-‘쓰리 빌보드’’
변할 수 있어 아름다운-‘쓰리 빌보드’’
  • 이상길 기자
  • 승인 2018.04.19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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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쓰리 빌보드' 한 장면.

사물을 하나로 특정하면 분명 편하다. 이름을 부를 때가 그렇다. 하나로 특정하지 않으면 의사소통 자체가 쉽지 않다. 사자가 ‘사자’ 외의 종족 명칭을 갖거나 이름이 여러 개인 사람을 가정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물론 인간의 언어에는 ‘유의어(비슷한 말)’라는 개념도 있지만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하나로 특정하는데 익숙해져 왔다. 또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앞서 말했듯 편의상의 이유일 뿐, 그걸 사물의 본질로 규정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사실 특정하는 순간, 그 대상은 멈춰버린다. 우주만물은 끊임없이 변하는데도 말이다. 쉬운 예로 우리가 누군가를 “착하다”고 평가할 때 보통 그는 특정된다. 착하니까 쭉 착해야 하고, 들키지만 않으면 못된 일을 했을 때도 “착하다”는 평가는 여전하다. 그쯤 되면 “착하다”는 그에 대한 평가는 더 이상 본질이 아닌 게 된다. 또 지금 바위라고 영원히 바위는 아니다. 오랜 풍화작용을 거치면 바위도 모래가 된다. 영원하지 않으니 지금 바위라 해도 바위가 그것의 본질일 수는 없다. 결국 이곳에서 본질을 찾자면 딱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만물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 그래서 아무 것도 특정할 수 없다는 게 오히려 본질에 가깝지 않겠는가. 나 정도의 나이면 어느 정도 감을 잡는 이야기일 거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생각까지 해가면서 <쓰리 빌보드>를 본다면 좀 더 영화를 흥미롭게 볼 수 있다는 것. 가끔은 생각하면서 보는 영화가 좋을 때도 있다. 이 영화가 그렇다.

<쓰리 빌보드>에서 범인을 잡지 못한 딸의 살인 사건에 대해 세상의 관심이 점차 사라지자 엄마인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마을 외곽 대형 광고판에 자극적인 세 줄의 광고를 실어 세상과 전쟁을 선포한다. 그 광고는 곧 방송까지 타며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되고, 그로 인해 마을의 존경 받는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헤럴슨)’와 경찰관 ‘딕슨(샘 록웰)’은 무능한 경찰로 낙인찍히고 만다. 그런 가운데 자기 일이 아닌 만큼 시끄러워지는 게 싫었던 마을 주민들이 경찰 편을 들면서 밀드레드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간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누구든 딸이 살인범에 의해 강간당한 뒤 화형까지 처해진 고통을 겪은 밀드레드를 동정할 거라 본다. 하지만 엄마는 엄마고, 분노는 분노. 복수심을 먹고 점점 덩치가 커진 밀드레드의 분노는 점차 관객들로부터도 미움을 사게 되는데, 그 즈음 영화는 판을 서서히 뒤집을 준비를 한다. 마침내 자막이 올라가면 관객들은 영화 중반까지 등장인물들에 대해 가졌던 선입견이 철저히 무너지면서 녹초가 되어버린다. 뜨겁다가 따뜻한 것보다는 차갑다가 따뜻할 때 그 따뜻함은 제대로 다가오기 마련.

특히 딕슨의 변화는 전혀 어색하지 않게 당위성이 부여되면서 커다란 감동을 선사한다. 순간 ‘난 사람을 얼마나 쉽게 판단했던가’하는 자괴감마저 밀려들더라.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화해의 감동보다는 그렇게 인간의 본질에 대한 영화였다.

다른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늘 흰색, 아니면 검정색만 본다. 내게 도움이 되거나 내 편이면 흰색, 그렇지 않으면 검정색이다. 그가 입는 옷의 색깔이 바뀌어도 그건 마찬가지. 어차피 홀딱 벗으면 자신과 같은 살색이니 그 사람의 색을 정하는 건 결국 그의 마음이 아닐까. 허나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한 가지 색으로 규정하긴 어려운 법. ‘빨주노초파남보’의 대자연이 그렇듯 마음이란 것도 컬러풀해서 진정 아름다운 게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제부터 타인을 볼 때 흑백을 넘어 빨주노초파남보까지 다 한번 찾아보심 어떨지. 온통 새까맣다가 마지막엔 알록달록 단풍이 든 것같이 예뻐지는 이 영화처럼 아마 세상이 좀 더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2018년 3월 15일 개봉. 러닝타임 115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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