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 춘향대제(春享大祭)’와 ‘울산학춤’
‘박제상 춘향대제(春享大祭)’와 ‘울산학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4.08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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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왜(倭)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 박제상을 위한 춘향대제를 울산에서는 매년 음력 2월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치산서원(?山書院)에서 봉행하고 있다. <박제상유적지보존회>(회장 김영달)는 지난 1일, 울주군 두동면 박제상유적지 경내에서 ‘제39회 충렬공 박제상 춘향대제(春享大祭)’를 봉행했다. 올해 춘향대제의 캐치프레이즈는 ‘충(忠)·효(孝)·열(烈)·예(禮)로 느끼고 전통문화로 즐기자!’였다. 이날의 대제는 맑은 날씨가 큰 부조(扶助)를 하고 활짝 핀 벚꽃이 화등(花燈)이 되어 원만하게 치러졌다. 박제상(朴堤上)의 호는 관설당(觀雪堂)이다.

2015년 제36회 때 처음 충렬공 박제상 춘향대제에 참여한 울산학춤보존회는 올해로 4년째 이 행사에 동참했다. 울산학춤보존회의 역할은 ’관설당과 그의 아내 김 씨 부인, 그리고 장녀와 막내딸 등 4명을 해원(解寃)의 상징으로 삼아 이분들이 모두 학(鶴)이 되어 사방으로 자유롭게 날아다니게 한다는 의미로 ‘울산학춤’을 춘다. 울산학춤의 순서는 비록 식전에 마련되지만 무수(舞手) 개개인은 대제 봉행의 확대·연장선상에서 의례무(儀禮舞)를 춘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관설당 넓은 마당에서 무수 7명이 펼치는 울산학춤의 봉행은 이제 충렬공 춘향대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충렬공 박제상 춘향대제(春享大祭)는 올해로 39회째다. 조선 영조 21년(1745년)에 최초로 건립되어 박제상과 그 부인 그리고 두 딸을 위한 향사로 지내 왔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폐쇄되었다가 1990년부터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울산학춤보존회는 울산학춤을 전승하는 전문예술단체로 올해 21년째 활동하고 있다. 울산학춤은 신라 말(901년)에 생성된 ‘계변천신(戒邊天神) 설화’를 바탕으로 1997년에 만들어져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치산서원에서는 박제상과 그의 부인 김 씨 그리고 두 딸인 장녀 아기(阿奇), 셋째 딸 아경(阿慶) 등 모두 4명을 모셨다. 울산학춤은 대형 섭금류(涉禽類)인 학(두루미)의 날개 펴기, 기지개 켜기, 한 다리로 서기, 걷기, 먹이 먹기, 날기, 잠자기, 깃 고르기 등 다양한 행동을 춤으로 만든 조류모방 춤이다.

박제상의 춘향대제에 춤을 도입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춘·추 대제에 악(樂)이 사용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부정적 인식이 문제였다. 종묘와 문묘에서 제례악의 연주와 일무의 작무는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지역의 춘·추향대제에 전통무용을 동참시키는 문제에는 절대적으로 부정적이었다. 강한 부정은 그동안 지역 대제 봉행에서 한 번도 춤을 도입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대제에서 춤의 도입을 망설였고, 박제상 대제 역시 같은 분위기였다. 또 다른 부정적 관점은 제향(祭享) 봉행의 중심에는 반드시 엄숙과 경건 그리고 정숙이 모든 참가자의 마음속에 움직이지 않는 큰 바위같이 자리를 잡아 답습(踏襲)되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부녀자와 아이의 참가가 제한된 시대도 있었다.

울산학춤이 박제상 춘향대제에 동참하게 된 것도 쉽지가 않았다. 이는 <박제상유적지보존회> 회장을 비롯해 사무국장 그리고 여러 회원의 개혁적 사고에 의한 실천과 활용 덕분이었다. 그 결과 울산학춤은 박제상 춘향대제에 4년째 오를 수 있었고, 또 다른 대제에서 울산학춤이 동참하게 되는 파급효과도 가져왔다. 박제상 춘향대제 역시 동참자의 증가로 이어졌다.

이러한 대제의 활성화 이면에는 특히 열린 마음가짐을 지닌 사무국장의 시의·시대적 혜안이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도 일부 대제 봉행에서는 시의·시대적 정서를 읽지 못하고 엄숙·경건·정숙과 같은 형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동참자들이 매년 줄어드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형식의 지나친 부각은 알림과 소통을 망각하고 대제를 제사 중심으로 굳어지게 만들었다.

‘엄부(嚴父)’라 부를 정도로 아버지의 권위를 너무 부각시키다보면 자녀들과 마주하는 자리는 부담스러워지기 마련이다. 이와는 달리 ‘자모(慈母)’라 불린 어머니는 항상 소통하며 살다보니 노년도 자녀들과 더불어 즐겁게 살 여지가 생긴다. 결국 아버지의 노년은 외로움에 젖어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울산학춤의 대제 동참은 마른 땅에 물길을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인·의·예·지·신을 바라보며 공자 왈, 맹자 왈만 답습하지 않고 현실에서 실천하고 활용하는 사람이 진정한 조대(措大)선비가 아니겠는가. 어떤 대제라도 봉행할 때는 행적을 바르게 알리는 행사에 치중해야 한다. 행적 알림보다 혈식(血食) 형식의 답습된 고집은 이제 시대적으로 점차 갱신(更新)되어야 장차 이어갈 유소년의 동참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대제의 작무에 동참한 울산학춤 무수(舞袖) 7인이 던지는 상징성은 박제상과 관련된 은을암, 망부석, 비조, 칠조, 치산, 치술령 등의 지명을 연결시킨 스토리텔링의 확대라고 본다. 이 또한 박제상의 행적을 알리는 방편(方便)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김성수 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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