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시작의 덫
사랑, 시작의 덫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3.08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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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50가지 그림자: 해방’
▲ 영화 '50가지 그림자' 한 장면.
사랑이라는 놈을 지나치게 높게 보다 보면 ‘시작의 덫’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한창 연애 중인 이들에게 “어떻게 만났어?”라는 질문은 필수기 때문. 상처를 각오해야 하는 만큼 원래부터 시작하기 어려운 게 사랑이라서 사람들은 그 시작도 소위 ‘공식인증절차’라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친구나 지인의 소개를 받거나 미팅, 혹은 자주 보면서 좋아지게 됐고 그러다 보니 고백까지 이르게 되는 그런 정상적인 과정들 말이다.

허나 사랑의 시작에는 속된 말로 ‘음지테크’라는 것도 존재한다. 남들이 물었을 때 당당하게 만남의 과정을 밝힐 수 있는 양지테크가 있는가 하면 말하기 조금은 부끄러운 이야기가 음지테크다. 테크는 ‘스타크래프트’라는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주로 쓰이는 ‘테크트리(Tech Tree: 발전 계통도)’의 준말이다. 그런데 이 음지테크는 보통 시작부터 성적인 관계로 맺어진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시쳇말로 좋아서 하게 된 경우가 아니라 하다 보니 좋아지게 된 경우다. ‘이안’ 감독의 <색, 계>에서도 왕 치아즈(탕웨이)는 죽이기 위해 꼬신 이 대장(양조위)과 자주 관계를 맺다가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전문용어로 ‘색정’이라 부른다.

업어치나 매치나 결국 사랑하면 다 하게 되는 건데 세상의 시선은 공식인증절차를 밟지 않은 이 음지테크의 사랑에 대해서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다고 헤어질 때 덜 아픈 것도 아닌데. 어차피 사랑에 있어서 시작은 그냥 스파크가 일어나는, 즉 불꽃이 튀는 방식의 차이일 뿐. 어디서 어떻게 만났든 사랑은 빠진 그 후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해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시리즈의 이번 종결편에서 ‘해방’이라는 부제는 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신흥 재벌로 자신의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위해 음지테크만을 열심히 타 왔던 그레이(제이미 도넌)가 아나스타샤(다코다 존슨)를 만나 변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이 시리즈는 이번 최종 편에서 결혼과 출산이라는 그레이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던 평범한 결말로 마무리를 짓는다. 물론 변화는 아나스타샤의 몫이기도 했다. 동시에 영화는 수갑에 채찍까지 들며 덤벼드는 그레이의 변태적인 성적 취향을 이해하며 변해가는 아나스타샤의 모습도 함께 그려나간다. 그렇게 사랑은 상대방의 그림자까지 보듬는 것, 사랑도 사람처럼 성장해가기 마련이다. 둘은 그렇게 시작의 덫에서 벗어난다.

사실 그레이에게 있어 그 덫은 ‘평범함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돈을 무기로 계약서까지 작성하며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시작했던 그에게 평범한 결혼과 출산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관계를 맺으며 육체보다 더 커져가는 마음은 결국 그 덫을 무장해제 시키고 만다.

반면 아나스타샤에게 있어서 그 덫은 ‘진심이 아닐 거라는 선입견’이었다. 다시 말해 그렇게 시작한 관계였던 만큼 그레이가 아무리 잘해줘도 진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잠자리는 가볍지만 진심은 무거운 법. 그 무게를 알게 된 아나스타샤도 결국 그 덫에서 벗어나게 된다. 해방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번에도 야한 장면을 떠올리며 찾았던 상영관이었지만 그간 요란했던 그들의 연애과정과는 다소 이질적인 결혼과 출산이라는 결말이 개인적으로는 참 좋았던 것 같다. 후후. 다 떠나서 이것저것 재다 보면 살면서 사랑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기 마련. 사랑의 시작에 빈부격차 따윈 없지 않을까. 일단 스파크가 일어나 시동이 켜지기만 했다면 사랑은 늘 진행형이다. 어떻게 만들어나갈 지는 당신 몫이다. 2018년 2월 21일 개봉. 러닝타임 105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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