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 그리고 시대정신
동상, 그리고 시대정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3.0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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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에 몰아친 ‘친일 지우기’ 바람>

99주년 삼일절 즈음, 수도권 일부 대학가에 칼바람이 몰아쳤다. 사학(私學) 설립자를 겨냥해 ‘친일파(親日派)의 흔적’을 지우려는 우국(憂國)의 바람 같기도 했다. 유튜브에는 ‘친일 행적 알리기’ 동영상이 삼일절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나라 팔아먹은 ‘친일파 동상’ 버젓이 세워져 있는 학교 6곳>이란 제목까지 달렸다.

고려대 학생회는 서훈을 박탈당한 설립자 ‘인촌 김성수’의 동상 철거와 교내 ‘인촌기념관’ 명칭 변경을 학교 측에 요구했다. 항일독립운동가단체는 고려대 앞 ‘인촌로’의 도로명 변경을 위한 서명운동 준비에 나섰고, 전북 고창에서는 김성수 생가의 도(道) 기념물 지정 취소 움직임이 포착됐다.

친일파 흔적 지우기 바람은 이화여대에서도 불기 시작했다. 학생들로 구성된 ‘친일 청산 프로젝트 기획단’은 설립자 김활란의 교내 동상 앞에 그녀의 친일 행적을 알리는 팻말을 다시 설치할 것을 예고했다. 기획단은 고려대를 비롯해 설립자가 친일파로 낙인찍힌 다른 대학과도 손을 잡는 공동전선 카드도 만지작거린다는 소식이다. 몇 해 전 연세대 학생들은 설립자 백낙준의 동상 철거를, 한국외대 학생들은 설립자 김흥배의 동상 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들의 친일(親日)이 학생들의 우국충정에 불을 지폈던 것이다.

그런데도 비수도권 대학가만은 삼일절이 며칠 지난 지금까지도 무풍(無風)지대로 남아있는 느낌이다. 친일의 올가미를 씌울 만한 대상이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새 물결…“학교 동상을 현대인물로”>

석상(石像), 석고상은 논외로 하고 동상(銅像)만 놓고 본다면, 또 다른 의미의 ‘무풍지대’는 전국 곳곳에 널려 있다. 학교장의 영향력이 강한 초·중등 일선학교들은 거의 모두 예외가 없다. 학생들에게 정신적 사표(師表)로 추앙받기를 기대하고 세운 ‘역사 속의 인물’ 동상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갈아세우겠다고 나서는 이 없으니 고개가 갸웃거려질 뿐이다.

울산지역 학교 네댓 군데를 둘러본 소감이지만, 동상의 주인공들은 식상할 정도로 천편일률적이었다. 세종대왕·이순신장군 동상은 기본이고, 간간이 신사임당·유관순, 김유신·화랑 동상에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의 주인공 이승복 어린이 동상에 이르기까지, 40∼50년 모진 풍상(風霜)를 용케도 견뎌 왔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느낌에 마침표라도 찍을 것 같은 뉴스를 최근 인터넷에서 접하고 눈이 번쩍 뜨였다. “요즘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고 운을 뗀 KBS 기자는 ‘새로운 흐름’ 몇 가지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세계적 산악인 엄홍길 씨(휴먼재단 상임이사)의 모교인 고성 호암초등학교에서 역사 속 인물 대신 이 학교 졸업생의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는 소식이 대표적이었다. “엄홍길 아저씨처럼 노력하고 인내심을 기르고 또 끈기 있게 이끌어 나가는 걸 배우고 싶어요”라는 이 학교 5학년 여자어린이의 말은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KBS 기자는 “과거에 갇혔던 동상들이 현대인들의 영웅으로 되살아나고 있다”는 맺음말로 리포트를 마쳤다.

울산교육청 자료를 인용한 한 언론 보도를 보면 지난해 6월 기준, 울산지역 72개 학교에 세워진 동상 251개 가운데 63.3%(159개)가 낡았거나 흠집이 나 있다. 교육청은 보수·정비 예산을 마련하고 역사·인성교육도 추진하겠다고 대책을 밝혔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려는 시대정신(時代精神)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움으로 남았다.

‘과거에 갇혀 있는 것’은 빛바랜 동상만이 아닌 것 같다. 학교장도 교육당국도 과거의 울타리 안에서 빛바랜 박제(剝製)가 돼 가는 것도 전혀 모르는 것 같아 안쓰럽기조차 하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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