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칼럼]겨레의 영산 태백산에 올랐어라
[이정호칼럼]겨레의 영산 태백산에 올랐어라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2.1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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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째 이어지는 맹추위를 뚫고 집을 나섰다. 이번 산행은 한반도에 몰아치고 있는 한파와 맞장을 떠야 하지 싶었다. 이렇게 추운 날에 산에 간다고 타박하면서도 뜨거운 죽을 끓여서 보온병에 넣어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비장한 각오를 하고 나서서인지 같은 차에 오른 친구들과 나눈 인사는 여느 날보다 반가웠다. 다들 새벽을 가르면서 서둘러 나왔음에도 방한을 위한 복장이 완벽해 보였다. 동해안을 따라 국도 7호선을 세 시간 가까이 달린 후 한 시간 조금 더 내달아 태백시 유일사 주차장에 닿았다.

동해안에서 내륙으로 가는 길은 거의 다 험난하다. 태백줄기가 남으로 뻗으면서 형성된 골짜기를 따라 험준한 고갯길을 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 길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밭을 일구고 사는 것이 신기롭기도 하거니와 그곳에서 대를 이어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의 삶이든 위대한 일이 아닌가. 이 길은 12년쯤 전에 차를 몰고 넘은 일이 있는데, 그때는 온통 백설로 뒤덮인 세상이었다. 애간장을 태우던 주유소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의 반가움과 더불어 그렇게 아름다웠던 그날의 차창 밖 설경들이 자주자주 떠올랐다.

800여 미터 고개에서 내려 아이젠과 스패츠를 차고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걷는 길은 기쁘게도 눈길이었다. 태백산에는 유난히 눈이 많다더니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사람들이 정말 많았는데, 이리저리 둘러봐도 모두들 젊고 씩씩해 보였다. 한 시간 여를 걸어 올라가 눈밭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차 안에서 산대장은 휘몰아치는 칼바람에도 대비해야 하며, 물도 얼고 술도 얼고 다 얼기 때문에 갖고 가지 말라고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산마루에 올라서면 아마도 진짜 추울 거라 생각하며 가파른 오름길에 접어들었다.

주목 군락지가 나타나자 기분이 마구 좋아지기 시작했다. 동행하는 친구들은 여러 번 와봤다는데 나는 그날 처음으로 태백산을 오르고 있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든지, ‘반생반사’라는 애칭을 가진 주목들은 거의 다 고사를 막기 위해 나무의 빈속을 채워놓았다. 같은 주목이면서도 수형이 모두 달라 어찌 보면 괴목 같고, 또 어찌 보면 분재 같기도 하였다. 이 멋들어진 주목들은 모델료도 없이 모든 이들의 카메라에 담겨주니 참 넉넉하기도 하다. 발이 눈 속에 푹푹 빠지면서도 마치 봄날처럼 포근하니 이 무슨 신의 조화인지 고맙기 그지없었다.

마침내 최고봉에 이르니 쌓아놓은 제단이 하늘로 향해 있었다. 장군봉이라는 정상석은 제단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조금 아래에 서 있었다. 탁 트인 길 서쪽에 더 큰 규모의 제단이 있었는데, 가운데에는 ‘한배검’이라는 붉은 글씨를 쓴 청석을 세워놓았다. ‘한배검’이란 대종교에서 단군을 높여 부르는 이름이다. 이 돌은 자그마하지만 새겨진 글씨 때문에 신성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옆에 좌정하고는 기도에 몰입하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곳은 산정에 있는 세 개의 천제단 중 규모가 가장 큰 한배검단으로, 장군단과 하단의 중간에 있다.

단군설화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이라는 점과 곰 부족이라는 신성성이 내포된 설화이다. 중국 고대 사서에 기초하고,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여 구성하였으므로 신화가 아니라 성인의 탄생설화로 보는 것이 옳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으로 내려와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왕검을 낳았다는 곳은 백두산이나 묘향산일 것으로 지목한다. 그와는 별개로 이곳 태백산은 백두대간 한가운데에 우뚝한 명산이요, 천신과 단군과 산신을 모시는 민속신앙의 성지이며, 우리 배달겨레의 신령스러운 산이다.

가파른 길로 조금 내려오면 단군 비각이 서 있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되자 낙향하여 살고 있던 ‘추익한’이 태백산의 머루와 다래를 따서 자주 진상하였는데, 어느 날 꿈에 곤룡포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오는 단종을 만나게 된다. 그날 단종이 영월에서 승하했다 하여 단종을 태백산 산신령으로 모시면서 해마다 제를 올린다니 어린 왕의 넋도 평온을 얻으리라. 이어지는 하산 길은 완만하여 걷기에 그만인 눈길이었다. 눈은 낙엽송 숲 아래에도, 천년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바위에도 얌전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산을 다 내려와서도 볼거리는 많았다. 산 끝자락에 있는 단군성전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단군을 우리 겨레의 시조로 보지 않고 신앙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조금 내려오니 ‘산소 도시 태백’이 자랑하는 눈꽃축제가 한창이었다. 눈으로 만든 초대형 조형물들을 보면서 재주 많은 사람들이 많기도 하구나 싶었다. 조금 일찍 내려와서 낙동강 발원지인 ‘황지’를 못 다녀온 것이 약간은 아쉽지만 온종일 눈을 밟으면서 태백의 밝은 기운을 마신 것만으로도 기쁨은 넘치고 또 넘친 시간들이었다.

이정호 수필가,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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