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편지] 천년의 신비 ‘농다리’
[길 위의 편지] 천년의 신비 ‘농다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2.18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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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우듬지 아래 감긴 오색천이 휘날린다. 옷고름 매만지며 넘던 아낙의 치맛자락이 저리 펄럭였을까. 봄이면 산제비 넘나든다는 성황당 길, 진천 용고개 고갯마루에서 걸음이 멈춘다. 성황당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나무나 돌, 장승 등으로 성황(서낭)을 모신 곳이다. 살고개라고도 불리는 이름이, 간직해 전해지는 사연을 짐작케 한다.

진천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된 화산리에 큰 부자 마을이 있었는데 스님이 시주를 청하자 사람들이 거절을 했다. 화가 난 스님은 이를 괘씸히 여겨 마을 사람들에게 앞산을 깎아 길을 내면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대로 하니 그곳에서 피가 나왔고 그후 마을은 망하여 없어졌다고 한다. 산에 살던 용의 허리가 잘린 것이다. 이후 사람들이 액운퇴치와 무병장수를 빌며 오색 헝겊을 걸었다. 지나는 길손들의 엽전이 쌓였을 테고 지금은 소원을 빌며 돌무더기를 쌓는다.

시간을 거슬러 걷고 있는 이 신비스러운 길은 사실 예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잠시 전 천년의 시간을 싣고 흐르는 돌다리를 건너 이곳 미르숲에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돌다리. 생거진천,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농다리이다. 마치 물속에서 검은 정령이 솟아나, 내딛는 발 아래로 등을 내어주는 듯하다. 지네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얼기설기 물살을 이고 굳게 박혀있다.

농다리의 유래를 살펴보면 고려 초, 93m의 길이로 너비 3.6m, 높이 1.2m, 음양을 배치해 28칸으로 만들어졌다. 얇고 넓은 돌들을 엮어 중간 중간을 수문처럼 물이 흐르도록 하고 중앙을 가로지르는 긴 상판석을 올렸다. 물길을 거스르지 않고도 사람이 다닐 수 있게 자연친화적으로 만든 돌다리이다. 얼마 전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를 든 봉송단이 천년의 농다리를 건넜다. 어느 겨울, 눈이 내려 하얀 용 한 마리가 강을 건너는 듯한 사진에 매혹되어 머릿속 잔상으로 남아 있다가 설날 귀성길에 들른 나도 발자국을 남긴다.

고속도로 옆이라 그런지 찾는 사람들이 많다. 유례없던 한파가 잠시 누그러지고 오고가던 이들의 마음에도 봄을 들이기에 좋은 날씨. 농다리 옆으로 풀어헤친 머리카락 흩날리며 서있는 버드나무 한 그루. 봄이 온다니 가지 끝 잎이 숨을 쉬고 있나보다. 멀리서 바라보는 자태의 연둣빛 아우라가 한껏 얼었던 마음을 녹인다. 검게 엎드린 돌다리를 건너 아직 돌아오지 못한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있는 여인 같기도 하다. 어떤 이는 살기 위해 저 다리를 건너 고향을 떠났을 테고 누군가는 죽어 꽃상여 타고 다리를 건너기도 했을 것이다.

천년의 다리를 건넜으니 또 다른 은밀한 선물 한 가지는 덤이다. 바로 꽃이 내는 향기인데 그 향기가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것이다. 첫사랑의 누나 같은 이름, 아름답고 귀한 미선나무가 이곳에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며 열매가 둥근 부채 모양이라 미선(美扇)이라고 부르는 이 나무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 3월의 봄을 알린다. 아직은 일러 꽃이 피지 않았지만 씨앗을 품고 주렁주렁 매달린 작은 심장 같은 열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과 한 알이 몇 개의 사과를 품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던가, 씨앗을 고이 품고 지난한 계절을 건너는 모든 생명체의 경이로움, 어느 봄날 낯선 향기를 기다린다.

건넜던 다리를 다시 건너온다. 두어 시간 짧은 산책길이었을 뿐인데 나조차도 기억하지 못한 어느 전생을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다. 천년의 다리를 건너 그런 것일까, 오색 천 흩날리는 성황당 앞에 돌 하나 얹어 그런 것일까. 멀찌감치 보이는 고속도로는 여전히 귀성길 차량으로 정지된 듯 서있다.

막히는 도로를 피해 초평저수지를 감고 도는 골짜기 굽이굽이 국도로 핸들을 돌렸다. 영화 속 풍경처럼 초평호는 낭만적이다. 꽁꽁 언 저수지 위로 노을이 내리고, 낚시를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수상 좌대들이 배와 함께 정지해있다. 겨우내 움직이지 못하고 인내한 모든 기다리는 생명들, 사물들. 돌아오는 봄은 마치 처음처럼 다시 새로워 천년을 잇고, 다시 처음처럼 경이로워 다시 천년을 이어간다.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는 꽃말로 피고 지는 미선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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