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길고양이로소이다
꿈은 길고양이로소이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2.08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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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사이드 르위’
▲ 영화 '인사이드 르윈'의 한 장면.

<인사이드 르윈>에서 주인공 르윈(오스카 아이삭)과 진(캐리 멀리건)이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통기타 가수인 르윈은 추운 겨울인데도 코트도 없이 기타 하나 달랑 매고 매일 밤 지인들의 집을 전전하는 무일푼 뮤지션이다. 듀엣으로 노래하던 파트너는 자살을 했고, 솔로앨범은 팔리지 않은 채 먼지만 쌓여간다. 그런 르윈에게 진은 “루저(패배자)”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녀 입장에선 그럴 만도 하다. 르윈은 진의 집에서도 신세를 졌다. 그러다 애인이 있는 진을 범하면서 그녀의 배에는 지금 애가 들어선 상황. 피임을 했던 만큼 르윈의 애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신세를 진 죄로 어쩔 수 없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신을 ‘루저’로 치부하는 진의 모욕적인 발언은 참을 수 없다. “앞가림도 못 한다”는 진의 질책에 마침내 르윈이 저항하듯 내뱉는다. “그러는 넌 ‘속물’이야.”

세상에 넘쳐나는 게 ‘루저’와 ‘속물’이지만 <인사이드 르윈>에서 이 두 단어가 더욱 슬프게 와 닿는 건 ‘처절함’ 탓이다. 르윈이 진을 향해 ‘속물’이라는 단어를 토해낸 건 비록 무일푼이지만 뮤지션으로서의 순수성은 아직 잃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 하지만 속물이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는 루저의 현실은 처절하기 그지없다. 초라함을 넘어 처절해지기까지 하면 꿈도 안쓰러울 수밖에 없다. 그랬다. 온통 우중충한 잿빛 화면으로 뒤덮인 이 영화에서 가장 불쌍한 건 주인공 르윈보다는 여태 버리지 못하는 그의 꿈이다. 영화 속에서 그 꿈은 그가 만나는 ‘길고양이’로 묘사된다.

르윈이 뉴욕 뒷골목 음침한 한 카페 무대에서 멋지게 포크송을 부르며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그의 꿈은 집에서 기르는 나름 우아한 집고양이 같아 보였다. 하지만 노래가 끝나자마자 르윈은 낯선 사람에 의해 밖으로 불려나가 속된 말로 얻어터진다. 개인적인 원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마지막에 그 장면이 다시 등장하면서 얻어터진 건 르윈이 아니라 그의 꿈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된다. 아무튼 그 무렵 르윈에겐 고양이 한 마리가 동행하게 된다. 영화 초반 골파인(에단 필립스) 교수 집에서 신세를 진 뒤 집을 빠져 나오다 자동 잠금문이 닫히면서 기르던 고양이도 함께 뛰쳐나와 버린 것. 이때부터 집 나간 꿈의 여행이 시작된다.

몇 시간 뒤 르윈은 교수에게 돌려줄 고양이를 잃어버린다. 다시 신세를 지게 된 진의 집 창밖으로 도망가 버린 것. 하지만 다행히 진과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르윈은 지나가던 고양이를 보게 되고 뛰쳐나가 잡아서 다시 교수에게 돌려준다. 하지만 생김새만 비슷했지 그 고양이는 원래 교수의 것이 아니었다. 이름도 없는 길고양이었던 것. 그랬다. 애초에 르윈의 꿈은 길고양이었다. 아무리 가슴을 담아 노래를 불러도 주목받을 수 없었다. 해서 노래가 끝난 뒤 르윈은 관객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많이 들어본 듯 하실 겁니다. 포크송이란 게 그 놈이 그 놈이라.” 이름 없는 길고양이도 그 놈이 그 놈이다. ‘밥 딜런(유명 포크송 가수)’이 되지 못할 바엔 꿈도 그 놈이 그놈이다.

기회를 잡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카고행에 몸을 실은 르윈. 하지만 운전 도중 도로를 횡단하던 길고양이 한 마리를 치게 된다. 다행히 죽진 않았지만 그 고양이는 피를 흘리며 숲으로 사라진다. 르윈의 꿈도 그렇게 피를 흘리며 사라져 간다. 푼돈을 위해 다시 무대 위에 서는 르윈,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노래만은 아름답다. 늘 그렇듯 대다수의 꿈은 길고양이로소이다. 예쁘지만 이름은 없다.

2014년 1월 29일 개봉. 러닝타임 105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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