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짝지근한 ‘울산소금’ 이야기
달짝지근한 ‘울산소금’ 이야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1.22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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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은 사람의 혈액 속에 항상 0. 9%가 함유돼 있어야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만큼 소금은 사람의 생리작용에 필수적이다. 소금장수에 얽힌 이야기는 참 많이 나타난다.

총각 소금장수가 연신 목덜미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고개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부잣집 주인 내외가 그 앞을 지나쳐 갔다. 주인이 가던 길로 되돌아오더니 뜬금없이 소금장수를 나무랐다. “우리 딸 건드리지 마라”라면서…. 영문도 모르는 소금장수는 얼떨결에 “집이 어딘가요?”하고 되물었다. 주인은 총각의 손을 잡아당기며 내려다보이는 동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세히 알려줬다. “저기 저 동네 큰 기와집이 내 집인데, 과년한 무남독녀가 혼자 집을 보고 있네.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자네한테만 알려준다네. 우리 내외는 멀리 잔칫집에 가는 길이고 아마 열흘쯤 걸릴 것이네만, 제발 찾아가지는 말게”라고 당부했다. 마치 생선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긴 격이었다. 총각이 부잣집 대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처녀가 나왔다. 고개에서 만난 부모님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일러 주었다. 처녀는 의아해하면서도 부모님이 시킨 줄로만 알고 그를 맞아들여 열흘을 보냈다. 주인 내외가 돌아와 보니 이미 일은 벌어져 있었고, 결국 사위로 맞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젊은 소금장수가 부잣집 사위로 들어앉았다는 이야기다.

‘우리 댁의 서방님은 잘 났든지 못 났든지/ 얽어매고 찍어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노가지나무 지게위에 엽전 석 냥 걸머지고/ 강릉, 삼척에 소금 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굽이굽이 부디 잘 다녀오세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아리랑 중에서)

강원도 강릉과 삼척은 바닷가에 맞붙어 있지만 정선은 내륙에 위치해 있다. 소개한 민요 내용에서는 곰배팔이 신랑, 지게, 엽전 석 냥, 강릉과 삼척, 백복령 등이 주요어로 등장한다. 정선에서 먼 거리인 강릉·삼척 등지로 소금을 사러 갔다는 것은 소금의 필요성과 함께 소금이 바닷물에서 생산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염전은 바다 가까이 자리 잡아야 하고 밀물과 썰물이 안정적이면서 갯벌이 형성된 지형이라야 안성맞춤이다. 또한 맑은 날이 지속되어야 한다. 이러한 환경이 잘 갖춰져 있어야 소금 생산이 순조롭다. 천연 염전이 우리나라 서해안에 많이 분포한 이유이기도 하다.

소금의 맛은 짜다. 짠 성질은 부패를 막는 역할을 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 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복음 5장 13절)라고 했다. 소금을 사회의 부패를 막는 방부제로 비유했음을 알 수 있다. 지인이나 상대방에게 붙여주는 짠돌이, 짠순이, 왕소금 같은 별명 역시 소금에 빗대어 만든 말이다. ‘짠’과 ‘소금’ 속에는 분위기에 아랑곳없이 가진 것을 아껴 조금은 인색하게 느껴지면서도 알뜰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소금 먹은 놈이 물켠다’거나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와 같은 속담에서는 소금의 정체성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소금은 물에 잘 녹는 성질을 갖고 있다. ‘비가 올라나 말라나, ‘등금쟁이’한테 물어 봐라’는 말에서는 소금이 습기를 빨아들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마철에 소금단지를 열면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소금장수는 비와는 악연이다. 사주팔자가 매염봉우(賣鹽逢雨=소금장수가 비를 만난 격)라면 애정에는 좋겠지만 사업에는 블랙홀이다. 할머니에게 밀가루 장사를 하는 큰 아들과 소금 장사를 하는 작은 아들이 있었다. 바람이 불면 큰아들 걱정, 비가 오면 작은아들 걱정을 했다. 밀가루는 바람에 날리지만 소금은 수분을 흡수하고 비에 녹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소금이 귀했다. 귀한 만큼 가정마다 소금을 비축해두고 매우 아꼈다. 그러나 밤마다 오줌 싸는 어린아이의 야뇨증 치료에는 관대하게도 선뜻 소금을 내주었다. 합법적으로 이웃집의 귀한 소금을 얻어내는 지혜였던 것이다.

울산은 과거 소금의 도시로 알려졌다. 염포(鹽浦)는 전토염(煎土鹽)이 유명했던 울산의 굴화, 계변, 학성 등 여러 옛 지명 중 하나이다. 현재는 ‘염포동’이란 이름으로 그 흔적의 꼬리가 남아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염포’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유명했었다. 울산 소금의 역사는 조선조 세종 8년(1426년) 제포, 부산포와 함께 울산의 염포가 ‘3포 개항지’가 되면서 확인된다.

울산 남구지역은 공업단지 조성 이전만 해도 마채, 삼산, 돋질 등의 염전이 즐비했다고 전한다. 특히 돋질염전은 ‘돋질산 도깨비 풍악’ 설화가 전해지면서 ‘울산풍악’의 바탕이 되었다. 상쇠가 중심이며, 돋질산 염밭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소금은 고래·학과 함께 울산 남구가 지향하는 여러 문화 콘텐츠 중 하나이다. 소금 이야기를 한정된 식문화에서 벗어나 울산 환경변화의 역사로 접근하여 조명하면 특별한 또 하나 교육학습의 장(場)으로 부각시킬 수 있겠다.

김성수 조류생태학 박사·울산학춤보존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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