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편지] 우주를 줄게… 낭만의 핑크시티 자이푸르
[길 위의 편지] 우주를 줄게… 낭만의 핑크시티 자이푸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8.01.14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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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찬란한 빛의 도시 인도 아그라를 떠난 버스가 다시 먼지를 폴폴 가르며 달린다. 건조한 들판의 풍경들 사이로 화석처럼 마른 소들의 등뼈가 조금은 처연해 보인다. 듬성듬성 보이는 초록의 나무 몇 그루, 도로가를 뒹구는 바삭거리는 쓰레기더미 사이로 반짝이는 인도사람들의 크고 맑은 눈망울이 차창 밖을 서성인다.

인도 서부의 라자스탄 주는 특별한 색채로 도시의 이미지를 표현하는데 조드푸르의 블루, 황금빛 도시 자이살메르, 그리고 설렘을 안고 찾아가는 낭만의 핑크시티 자이푸르가 그렇다. 1876년 영국 식민지 시절, 이 지역을 다스리던 왕 ‘자이 싱 2세’가 영국 왕자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시가지 전체에 분홍의 페인트를 칠하도록 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원주민인 라지푸트족에게 핑크색은 환대의 의미였다.

한나절을 꼬박 달려 도착한 자이푸르. 버스가 도시 입구를 들어서자 분홍빛 건물들이 동화 속 풍경처럼 좌우로 정렬되어 있다. 색과 향이 강렬한 인도는 붉은 사암의 건축물이 많아 중세의 고풍스러움이 풍기는데 이 분홍빛 또한 이질적이지 않은 온화함이 느껴진다. 뜨거운 태양빛에 바래 다듬어진 또 다른 자연의 색을 가진 도시.

궁전의 인도답게 이곳 자이푸르에도 구백 여 개의 방을 가진 바람의 궁전 ‘하와마할’이 있고, 물위의 궁전 산 위의 궁전, 말로 설명하기도 부족한 아름다운 마할들이 많다. 하지만 이곳에 가장 기대가 되는 것은 ‘마법의 장치’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잔타르 만타르’ 천문대가 있다는 사실이다.

‘별빛 아래 잠든 난 마치 온 우주를 가진 것만 같아. 난 그대 품에 별빛을 쏟아 내리고 은하수를 만들어 어디든 날아가게 할 거야.’ 여가수의 비음 섞인 목소리가 매력인 볼 빨간 사춘기의 ‘우주를 줄게’라는 노래가 있다. 기원의 시작과 알 수 없는 끝이 세상 진리의 모두일까. 누구도 설명할 수 없기에 우주라는 단어는 내게 여전히 두근거림이기도 하다. 그런 우주를 사랑한 왕이 인도에도 있었다.

당시 왕이었던 자이 싱 2세, 그는 점성학과 건축·천문학에 능하고 관심이 많아 인도 여러 곳에 천문대를 세웠다. 그곳들 중 가장 큰 천문대가 이곳 자이푸르에 있다. 20세기 초까지 실제로 사용되어 온 관측소이다.

잘 꾸며진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 군데군데 천문관측 기구들이 석조로 만들어져 있다. 달과 해가 가는 길을 알고 싶어 했던 사람들, 태양과 별의 일식과 분점으로 경사도와 각도를 측정하는 기구, 60 방위로 나눈 방위표, 월식 별자리를 구분할 수 있게 만든 건축물, 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다만 사람의 눈과 머리로 알아낼 수 있는 것들. 무한하다는 우주의 시간과 공간을 옮겨 놓은 듯 정교하고 섬세한 관측기구 20여 가지는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올림푸스 신전에는 ‘시간의 신’인 크로노스의 상이 있다. 옷을 벗은 남자가 달리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고 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으며 머리카락이 이마 앞쪽으로는 늘어뜨려져 있는데 뒷머리와 목덜미엔 없다.

시인 포세이디프는 크로노스 신상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시간은 쉼 없이 달려야 하니 발에 날개가 있고, 시간은 창끝보다 날카롭기에 오른손에 칼을 잡았고, 시간은 만나는 사람이 잡을 수 있도록 앞이마에 머리칼이 있으나 지난 후에는 누구도 잡을 수 없도록 뒷머리가 없다. 시간은 곧 기회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며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리적인 시간 크로노스.

하늘을 찌를 기세로 서있는 해시계, 27m에 달하는 해시계는 지금 인공위성과 2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다고 한다. 끝이 없어 보이는 삼각형의 꼭짓점을 바라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난다. 시간이 비가역성이지 않았다면 인류가 이토록 집착하게 되었을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절실하며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것은 또 얼마나 초조해지는 일인가.

한참을 홀린 듯 살피다 보니 땅 위에 놓인 내 그림자가 길고 옅어진다. 태양의 기세도 사그라지는 시간. 천문대를 나와 급히 지프를 타고 석양을 바라볼 수 있는 산등성, 자하르기르성으로 향한다. 차가운 맥주를 한 잔 시켜놓고 하루를 짊어지고 사라지는 시간의 뒷모습을 바라본다는 것. 핑크빛 자이푸르 위로 붉은 주단이 펼쳐진다. 자, 이제 어둠과 함께 달과 별이 올 시간이라고.

최영실 여행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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