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삼호교의 피튜니아 꽃길과 ‘인간 우장춘’
신삼호교의 피튜니아 꽃길과 ‘인간 우장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9.21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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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없는 수박’ 하면 많은 사람들은 세계적 식물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 박사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씨 없는 수박을 육종한 사람은 우 박사가 아니라 일본 교토대의 육종학자 기하라 히토시 박사였다. 그럼 왜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을까?

1950년 일본에서 귀국한 우장춘 박사는 대한민국의 농업관계자와 국민들에게 종자산업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뭔가’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먹고살기에 급급했던 대한민국에서 “나팔꽃처럼 생긴 더블 피튜니아 꽃을 만들어 세계적 육종학자가 되었다”고 말하면 실감이 나질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신품종에 대한 새롭고 확실한 믿음을 주기 위해 육종학의 ‘기적’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 기적이 바로 ‘씨 없는 수박’이었던 것이다.

당시 언론사 기자들은 결과물만 가지고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만들었다”는 점을 크게 부각시켰다. 이 일이 확산되면서 사람들은 우장춘 박사를 세계 최초로 씨 없는 수박을 육종한 사람으로 믿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더 깊은 이야기기가 있다.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들지 않았지만 우장춘 박사는 그보다 더 중요한,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과학적 원리를 이미 규명했던 것이다. 바로 우장춘 박사가 1935년 실험으로 증명한 <종(種)의 합성> 이론이었다. 이 논거는 우장춘 박사의 가장 큰 업적으로, 히토시 박사도 이를 근거로 씨 없는 수박을 육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종의 합성>이란 무엇일까? 1936년 우장춘의 박사학위 논문 발표는 세계 육종학계의 최대 사건 중 하나였다. 바로 <배춧속(屬)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었다. 당시만 해도 같은 종(種)끼리만 교배가 가능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우장춘 박사는 종은 달라도 같은 속(屬)의 식물을 교배하면 전혀 새로운 식물을 만들 수 있음을 입증했던 것이다. 이 논문 발표로 다윈의 진화론에 나오는 “종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성립된다”는 가설의 수정이 불가피해지고 여기에 더해져, 종은 기존의 종간 교잡으로 새로운 종을 낳고 이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세포 내 염색체의 배가에 의한 것이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업적을 남긴 우장춘 박사가 부름을 받고 여생을 흔쾌히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바치고 조국에 뼈를 묻겠다며 귀국했던 것이다.

1951년부터 본격적인 행보에 나선 우장춘 박사는 채소 종자를 생산하기에 알맞은 땅을 찾아 제주도를 방문했다. 제주도는 장마가 빨라 꽃과 열매 맺는 시기가 겹쳐 좋은 종자 생산이 어려웠다. 대신 감귤 재배에는 알맞다고 판단했다. 우장춘 박사는 제주도의 농민에게 감귤 재배를 적극 권장했고, 그 덕분에 제주도는 우리나라 최고의 감귤 생산지가 됐다. 또 맛 좋고 병에 강하며 속이 꽉 찬 ‘청방’ 배추와 무 품종을 만드는 데 성공해 김치 종주국에서 일대 혁신을 이루었고, 바이러스에 쉽게 감염되던 강원도 감자의 품종도 개량해 맛 좋고 병충해에 강한 강원도 감자를 개발했다. 오늘날 강원도 감자, 제주 감귤과 ‘결구배추’ 하면 아직도 ‘청방’이라는 품종을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우리네 할머니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장춘 박사는 1926년 <종자(種子)로써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대하여> 등 19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이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드디어 겹꽃이 피는 피튜니아 계통을 육성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를 계기로 그 당시 최대의 겹꽃 피튜니아 종자 시장인 미국에 매년 종자를 수출할 수가 있어 그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우장춘’이란 이름을 더 널리 알리게 되었다.

아침저녁 찬바람이 내리는 즈음 신삼호교, 번영교, 학성교, 명촌교, 동천교, 외솔교, 삼일교를 지나면 농업기술센터에서 여름 내내 심고 가꾼 웨이브 피튜니아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종자는 이미 그 하나로 우주입니다”라고 외치던 박사님의 음성이 귓전을 울린다. 이 가을 신삼호교 웨이브 피튜니아 꽃길을 거닐며 그저 “꽃이 피었구나”가 하는 생각에만 잠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우주의 기운을 가슴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윤주용 울산시농업기술센터 소장 농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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