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과 울산 鄕土史
소금과 울산 鄕土史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7.12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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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식량과 물 밖에도 소금이 반드시 필요하다. 인류는 이 세 가지 필수 생존 자원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 삶터를 일궜다.

빙하기가 끝나고 현재의 해안선이 형성되면서 한반도에서도 신석기시대가 열렸다. 어디서나 물이 풍부한 한반도에서 사람들은 식량자원을 획득하기 쉬운 곳을 찾아 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식량자원을 얻기 쉬워도 소금을 구할 수 없으면 살 곳이 되지 못했다.

시람이 먹을 수 있는 소금인 식염(食鹽)은 암염(岩鹽)이나 바닷물에서 얻을 수 있다. 암염지대가 없는 한반도에서는 바닷물에서 소금을 얻을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먹고 있는 소금은 바닷물을 가두고 햇볕에 말려 얻어낸 천일염(天日鹽)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천일염법이 도입된 것은 100년이 채 안 된다. 전통적인 제염법은 바닷물을 끓이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얻은 소금을 자염(煮鹽) 또는 토염(土鹽)이라고 한다.

자염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바닷물 외에도 모래가 적당히 섞인 개흙이 있어야 했다. 바닷물을 그냥 끓여서는 나오는 소금이 적어 소모되는 연료와 품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바닷물의 염도를 포화상태에 가깝게 끌어올려 끓이는 것이 경제적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바닷물을 붓고 말리기를 반복한 개흙을 바닷물로 다시 헹구는 방식으로 바닷물의 염도를 높였다.

동해안에서는 울산이 자염생산의 최적지였다. 태화강과 외황강 하구에 개흙지대가 잘 발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외황강 하구는 석유화학단지로 편입됐다. 돋질산, 조개섬, 대도, 명촌, 삼산 등 태화강 하구도 지금은 공장지대와 시가지로 변했다. 이곳에서는 1960년대 초반까지도 소금을 생산했다.

지금은 현대자동차 주행시험장이 된 명촌의 토질을 기자는 발바닥으로 기억하고 있다.

초등학생 때 또래들과 그곳에 가면 우리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놀았다. 달리면 푹푹 패이는 모래밭과 달리 그곳의 땅은 갯벌에 아주 고운 모래가 섞여 있었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촉감도 좋았고 넘어져도 다치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바로 그곳이 자염 생산지였다. 그곳의 개흙을 소가 끄는 써래로 썰고 끌어들인 바닷물에 적셔 소금을 만들었던 것이다.

울산은 고대 이전부터 중요한 소금생산지였다. 그러나 전해지는 기록은 빈약하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소개된 울산팔영(八詠)에 ‘염촌담연(鹽村淡烟)’이라는 표현이 있다. 소금을 얻기 위해 바닷물을 끓일 때 피어오르는 연기를 말하는 것이다. 묵객들의 시구에도 간혹 소금연기가 등장한다. ‘염포(鹽浦)’라는 지명도 남아 있다.

그런데 잊혀져가는 울산의 소금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수습한 이가 있다. 영남알프스학교를 운영하며 지금은 호랑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배성동 작가는 옛 염부들과 소금장수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구술을 확보했다. 그리고 최근 ‘소금아 길을 묻는다’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엮어 세상에 내놨다.

염밭에서 땀흘리던 염부들의 생생한 회고와 등짐으로 영남알프스를 넘나들며 밀양, 청도 등으로 소금을 팔러 다니던 소금장수들의 고달팠던 삶을 건져낸 것이다.

동해남부선과 중앙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울산소금은 철길을 따라 안동, 영주, 제천까지도 팔려나갔다. 배 작가는 기차를 타고 소금장수길로 나섰던 아낙네들의 얘기도 놓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소금은 권력의 향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권력이 소금의 생산권과 유통·판매권을 독점하기 마련이다. 울산의 소금도 연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배성동 작가의 저술이 그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

강귀일 취재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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