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편지]위대한 유산
[길 위의 편지]위대한 유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5.28 21: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차창을 열자 이미 그리움이 되어버린 철 지난 아카시아 향이 코끝을 스친다.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 아래를 바라보니 해발이 제법 높다. 내륙에서 바다로 가는 동대산의 고갯마루 높은 지대에 있는 산골마을, 경주시 양남면 효동리 가는 길이다.

차도 숨이 가쁜 산 정상 부근에 다다르자 오른쪽으로는 깊은 골을 타고 다랑이 식 논이 가지런히 아래로 부채를 펼친 모양새다. 차가 다니지 못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사람은 분명 쉬어가야 할 터. 날이 저물어 행인을 유숙하게 하는 원(院), 우리말로 ‘머물다’는 뜻의 ‘머든’ 마을의 오른편으로 몇 가구가 남아 있다. 예전에는 주막도 있었다고 하니 묵고 가는 이의 그 고단함이 고스란히 그려지는 모습이다.

다시 차를 몰고 조금 더 내려가자 모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울 길이 오른쪽으로 휘어져 돌아나 있다. 사실 ‘숨어있는’ 마을을 보여주고 싶다는 지인에게 세상에 마을이 어떻게 숨어있냐며 따라나선 길이었는데 보자마자 정말 딱 숨어있다는 표현 말고는 떠오르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깊은 산골 마을이다. 숨어있는 것이 드러났을 때 그저 평범한 풍광이라면 표현이 과하겠지만 나타나는 마을 모습이 예사가 아니니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숨어있는 마을 효동2리, 월천마을이다. 다래 덤불이 우거져 다래를 따먹고 살았다고 달래골이라 부르기도 하고 맑고 깨끗한 냇물 위로 달이 비치는 모습이 아름다워 월천(月川)이라고도 부른다.

십년 전까지만 해도 오롯이 옛 모습을 간직했을 마을에 건설용 중기차들이 몇 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걸 보니 교통도 만만치 않은 이곳이 벌써 입소문을 탄 모양이다. 흐르는 계곡을 받치고 있는 산자락에 지난 차바 태풍의 피해로 생채기가 난 곳이 보인다. 산에서 굴러 내려온 큰 돌덩이들이 수로를 채우고 있고, 무너진 다리, 도로를 정비하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일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여전히 제자리를 찾고 있는 모습이 깊은 계곡을 채우는 서늘한 바람마냥 마음을 훑고 지나간다.

마을이 한 눈에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집 몇 채가 눈에 들어오고 마당 한 귀퉁이 맨바닥에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신다. “할머니, 나무가 평범해 보이지 않는데 무슨 나무인가요?” 집 앞마당에 수백 년쯤 되어 보이는 나무가 집 전체에 그늘을 드리운다. “뽕나무라, 저래 뵈도 일 년에 사오백만 원을 벌어들인다 아이가.” 시집오기 전부터 심어져 있었던 나무라 하니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먼먼 윗대 조상이 물려준 틀림없는 위대한 유산이 아니고 무엇인가.

해발 500M의 고산지대에서 나는 작물들은 주로 벼였고 약을 치지 않아도 병충해가 없어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은 쌀을 지고이고 고개를 넘어 감포장, 입실장에 내다 팔았을 터, 짐작으로 할머니의 등에 업힌 그림자는 예사가 아니다.

월천마을을 지나 다시 도로를 휘감고 내려오다 보면 한 눈에도 너른 들판이 연상되는 늘밭마을의 표석을 만나게 된다. 어전(於田)이라 불렸다는 이 마을은 스님의 바랑갓을 만드는 다년생 식물 늘밭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돌아본 효동리의 세 마을 중 가장 많은 가구들이 살고 있었고 너른 품에 놓인 마을이 평온해 보였지만 오랫동안 식수 문제로 곤혹을 치른다고 한다. 몇 해 전 지하수를 개발했지만 철분이 많아 생활용수로 쓰지 못해 매년 급수의 어려움을 겪고 계셨다.

‘주로 시골에서, 여러 집이 모여 사는 곳’이란 뜻을 가진 ’마을‘이라는 단어는 시골에서 살아보지 못한 내게는 왠지 모를 푸근함과 설렘을 가져다준다.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음직한 아련한 향수 같은. 얼마 전 여행을 좋아하는 지인이 톡으로 여행상품을 보냈는데 살펴보니 유럽의 어느 한 나라, 알려지지 않은 조그만 마을을 돌아보는 스케줄이다. 너무나 유명해져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는 이제 사람들에게 더 이상의 감흥이 아닌 모양이다.

머든마을, 월천마을, 늘밭마을,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이름마저도 아름다운 경주시 양남면 효동2리의 세 마을. 가깝고도 먼 시간을 간직한 이곳들이 후세에도 여전히 아름답게 남겨지길 바라는 마음, 여운은 깊고도 길다.

나고 지고, 자고 새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한 여인의, 지나는 나그네의 서사가 굽이굽이 감춰진 이야기를 어느 집 뽕나무가 기억하고 있을까. 험하고 낯선 산길을 운전하느라 긴장했던 몸이지만 오디 검붉게 익어 핏빛으로 떨어지는 계절이 오면 궁금해질 마음에 다시 발길을 기약해 본다. 돌아오는 길, 들켜버린 한 여인의 긴긴 숨으로 오고가는 파도를 바라보느라 바닷가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최영실 여행 수필가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