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관(官)주도에 묻혀 버린 원예생활
[인문학 산책] 관(官)주도에 묻혀 버린 원예생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5.10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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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환경개선사업을 통해 다듬어진 거리를 걷다 보면 길가에 화분이 즐비하다. 거리에는 가로수가 심어지고 작은 개울이나 형상물이 만들어지고 돈을 들인 거리는 갑자기 환해진다. 의자 겸한 조경석도 놓아지고 식물도 아기자기하게 심어진다. 땅에 바로 심을 자리가 없는 곳에는 큰 화분들이 거리를 꾸민다. 간판과 사람뿐이던 거리가 녹색식물로 풍성해진다. 상가들은 차 댈 수 있는 공간이 없어졌다고 간혹 불만을 터뜨리지만, 전반적으로는 반가운 일이라 여긴다.

하지만 거리에는 개인이 내놓은 화분 하나 만나기 힘들다. 지자체가 만들어 놓은 화단이나 식물에는 별 관심이 없고 자발적으로 가꾸는 원예문화와는 거리가 더 멀어진다. 이를 관리하는 회사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폭염에는 이들 회사가 바빠진다.

도심 속 내리쬐는 햇볕은, 원래 그 식물이 자라는 조건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여름, 도심 빌딩이 간직한 열기는 밤새 내내 뿜어진다. 겨울철에는 높은 건물 사이 거리로 골바람이 세차게 분다. 밤에는 식물도 광합성을 멈추고 쉬어야 하는데, 밤거리를 비추는 불빛은 쉬지 못하게 방해를 놓는다. 상가 가게들도 바로 코앞의 화분에 물 한 바가지 주지 못하는 각박함으로 식물은 타들어 간다. 내가 관여하지도 참여하지도 않은 일, 식물과 원예에 대한 관심과 취향이 없는 가게 주인만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런 공간이 시간이 지나면 어찌 되는가? 화단에 심어둔 관목 근처는 지저분해지고 심은 나무는 점차 쇠락해지고 초라해져 간다. 생태에 맞지 않거나 유지관리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좋은 나무를 심었다고 하지만 그 나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야 꽃을 화사하게 피우고 열매를 풍성히 다는지는 알지 못한 모양이다. 심었던 식물들 가지가 점차 말라 부러지고 갈수록 곪아간다. 처음엔 장대하여도 녹색식물은 가면 갈수록 초라해진다.

영국인들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원예에 대한 사랑이 깊다. 정원 속에서 그들은 지극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원예생활에서 삶의 지혜를 얻는다. 찰스 황태자도 자신이 황태자가 아니었으면 정원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정원 일을 좋아한다. 왕실은 전통적으로 왕가의 어린 자녀들에게 정원관리 수업을 시킬 정도로 식물사랑이 극진하다. 영국은 대형마트보다 더 많은 가든 센터(정원용품과 식물을 파는 일종의 정원백화점)가 운영되는 나라다.

영국 속담에 ‘정원이 없는 집에서 사는 것은 영혼 없이 사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개인당 정원면적이 가장 넓은 나라인 그들은 오래전부터 식물이, 원예생활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럼 우리는 혹 도시에서 영혼 없는 허깨비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오래 묵은, 이른바 달동네 골목길을 지나면 길가에 내놓은 화분을 자주 본다. 대문 혹은 옥상 위에는 스티로폼 박스나 양동이 등 보잘것없는 용기로 식물을 키운다. 예전 어르신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식물을 돌보며 지내는 것이 자연스레 몸에 배어 있다. 삶이 조금 남루하거나 나이듦이 주는 무료함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경작과 원예가 하나 되었던 과거 삶의 원형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화단이나 공원 식물들은 직접 땀 흘리는 자기노동과 체험이 들어있지 않고, 그 나무와 꽃들이 피는 과정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나에게 별다른 존재가 되지 못한다. 꽃이 화려하게 피면 잠깐 눈길을 주고 말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말은 자연의 매력이 마음에 들고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하면서도 들판을 마구 짓밟고, 마침내 꽃과 가지를 꺾는다. 그리고 금세 그것들을 내던져 버리거나 집으로 가져와 시들 때까지 방치한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다.”(헤르만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 중에서)

자연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약탈하는 문화에서 벗어나 도심텃밭을 중심으로 원예문화가 막 깨어나고 있다. 남에 의해 만들어진 크고 화려한 결과물보다는, 직접 참여하고 땀 흘리며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행복과 즐거움이 있음을. 그것은 단지 안전한 먹을거리에 대한 욕구만이 아니라 마음 속 그리운, 자연을 닮은 경관을 가까이에 만들려는 본능이다. 행복 기준은 자신이 가꿀 경작지가 있는가 아닌가로 나뉠 것이라 여긴다. 그곳이 도심이든 농촌이든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잊고 지낸 우리 삶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살아 꿈틀거리는 농심이고, 자급을 통한 주체적 생활을 위한 노력이다.

영국시인이자 가든 디자이너인 비타 색빌리 웨스트는 이런 말을 했다. “정원이 하나 더 생겼다면 인생의 배움도 하나 더 생긴 것이다. 배움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은 작은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우리 삶도 또한 이와 같다.” 원예문화가 주는 힘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동고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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