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
조명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4.24 21: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며칠 전 유명가수의 콘서트를 보러갔다. 공연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객석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가득 찼다. 가수가 등장하자 관객들은 함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조명은 그 환호에 답하듯이 더욱 요란하게 무대와 객석 사이를 종횡무진 누볐다.

조명에 비친 가수의 얼굴과 열정적인 몸짓이 무대 화면에 그려졌다. 반짝이 의상은 작은 움직임에도 더욱 빛을 발했다. 발라드가 흘러나오자 무대 위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조명이 밝아지자 눈송이는 함박눈처럼 쏟아졌다. 들뜬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사랑의 노랫말과 잔잔한 멜로디에 빠져들었다.

공연이 끝났는데도 관객들은 자리를 뜨지 못했다. 관객들의 계속된 앙코르에 노래는 다시 시작되었고 조명도 다시 빛났다. 신나는 댄스음악과 현란한 빛으로 공연장은 다시 후끈 달아올랐다. 노래가 끝나자 수십 개의 조명이 사그라졌다.

공연은 감동적이었다. 무엇보다 무대 위의 가수를 빛나게 해준 조명은 인상적이었다. 무대공연이 종합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주인공 혼자만의 독무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출연자, 음악, 조명, 무대장치까지 모두가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주인공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조명이 없었다면 무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는 음악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다. 함박눈이 쏟아진들 조명이 없었다면 그저 종잇조각에 불과했을 터다. 가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관객을 흥분시킨 것은 노래와 음악만이 아니었다. 빛을 주는 조명이 있기에 그 효과는 배가 되었다. 그날 콘서트는 노래 잘하고 잘 생긴 가수보다 무대를 더욱 화려하게 만든 조명 빛에 반한 공연이었다.

사회 곳곳에서 묵묵하게 이런 조명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일하는 부서는 구청의 생활지원과다. 주된 업무는 저소득층의 기초생활보장 지원이다. 우리 과 직원들은 조명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노숙자가 발생했다. 주소지가 불분명한데다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힘들어 보였다. 약간의 치매증상까지 있는 듯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웠다. 담당자는 오물이 묻은 몸을 씻기고 옷을 입히고 밥을 먹여 병원에 입원시켰다. 가족들을 수소문했지만 처와 자식들은 오래전부터 단절된 상태로 모두 나 몰라라 했다. 결국 정부 지원을 위한 절차가 진행되었다.

부모의 마지막 가는 길조차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름의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장례를 치러야 했다. 외롭고 쓸쓸한 주검이 불길 속에 던져졌다. 주변에서는 화구가 열리고 닫힐 때마다 크고 작은 울음이 반복되었지만 너무도 조용했다. 내 눈가만 촉촉이 젖었을 뿐이다.

온천지가 꽃으로 화사한 사월이다. 우리 팀은 이 시기에 가장 바쁘다. 상반기 복지대상자 확인 조사가 시작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변동사항이 통보된 1천 세대에 대해 일일이 확인하고 서비스를 유지할 것인지 중지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부정수급자에게는 급여 환수 조치가 내려진다. 처리 과정에서 고성이 오고가기도 한다. 우리에게 사월은 잔인한 달임에 틀림없다.

직원들은 내방민원과 전화민원에 하루 종일 쉴 틈이 없다. 본인이 원하는 복지서비스 욕구가 해결되지 않으면 화살은 정부와 공무원에게 돌아간다. 술에 취한 민원을 대하다 보면 취기가 올라올 지경이다. 똑같은 설명을 여러 번 반복해도 이해의 선을 넘지 못한다. 퇴근시간이 되면 몸과 마음은 녹초가 된다.

전화상담이 순조롭지 못하면 가정방문을 한다. 선정기준을 초과해 복지급여를 중지할 때는 자료를 면밀하게 검토한다. 수차례 상담을 하면서 다른 방법을 찾는다. 언제나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인권과 권익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던 사회복지사의 마음가짐이 느껴진다.

공무원이 된 사회복지사는 행정과 복지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면서 대부분 갈등을 경험한다. 현실적으로 법의 잣대에 맞추어 업무를 처리할 수밖에 없다. 일을 하다보면 실질적으로 생활은 어렵지만 제도권 안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사례가 있다. 이런 경우 지침대로 처리해야 하는 공무원의 역할과 사회복지사의 정체성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이 생긴다.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할 때는 긴급지원이나 민간단체 지원을 연계하기도 한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2000년도에 제정되었고 15년 만에 맞춤형 복지급여로 재탄생되었다. 차상위 계층에 대한 지원책도 다양하게 제도개선이 이루어졌다. 복지는 대상의 폭이 넓어지고 기준은 상향되고 보편적 복지로 진화하고 있다. 그러나 사각지대는 여전히 존재한다.

복지 사각지대 발굴 관련 공문이 수도 없이 내려온다. 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통장, 자원봉사자들은 주위의 어려운 이웃에게 관심을 두고 살핀다. 이들 또한 그늘진 사회에서 조명 같은 빛을 주는 존재다.

아마도 우리는 인생의 무대에서 누군가는 주인공으로 누군가는 조명으로 그 역할을 할지 모른다. 어떤 역할을 하든 주인공처럼 드러나지 않아도 자신의 위치에서는 자신이 주인공인 것이다. 가수의 공연이 출연진과 제작진이 만들어낸 종합예술인 것처럼, 사회도 이처럼 각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함으로써 어울려 살아가는 공동체가 된다.

복지공무원으로 일한 지 23년이 되었다. 나의 빛은 얼마나 멀리 비추었을까. 힘든 분들에게 따뜻한 온기로 다가갔을까. 다시 한 번 되돌아본다. 오늘도 사무실은 전화벨 소리와 자판기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하다. 직원들이 가정방문을 위해 서류가방을 챙긴다. 우리들이 밝히는 조명이 어두운 곳에는 빛을, 추운 곳에는 온기를 더해 따뜻한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무실 옆 공원에 영산홍이 예쁜 꽃밭을 이루었다. 아름다운 봄날이다. 그대들의 뒷모습은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어느 주인공보다 멋지다!

<안윤영 울산 동구청 생활지원과 통합조사관리 주무관>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