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 ‘4·19의거’라고도 부르는 ‘4·19혁명’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장기집권 음모에 따라 자유당 정권에 의해 1960년 3월 15일에 저질러진 3·15 불법·부정선거가 그 불씨였다. 그 해 4월 19일 3만 명 가까운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전국적으로 166명이 숨지고 1천명이 넘게 다쳤다. 일주일이 지난 4월 26일, 이승만은 마침내 하야를 선언하고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다. 그러나 그 해 5월 16일 박정희 육군소장이 주도한 5·16군사쿠데타로 허 정 과도정부가 단숨에 무너지고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대의 막이 오른다. 4·19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19혁명의 불씨는 울산에도 지펴졌다. 비록 객지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북구 농소면 천곡리에서 태어난 한 대학생의 정의로운 죽음 때문이었다. ‘정임석 열사 추모사업회’(회장 박기수 북구문화원장, 사무국장 정치락 시의회 운영위원장)에 따르면 4·19혁명 당시 한양대 공대 2학년생이던 정 열사는 ‘학생 대표로 시위대에 앞장섰다가’ 경찰이 쏜 총탄에 맞아 병원으로 옮겨졌다가 4월 25일 끝내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주검은 유족의 뜻에 따라 4·19혁명 희생자 중 유일하게 국립묘지가 아닌 현재의 고향 묘역(북구 천곡동 순금산 중턱의 선영)에 안장됐고, 장례는 울산군민장으로 치러졌다.
매년 4·19혁명 기념일마다 추모제례를 올리고 있는 정임석 열사 추모사업회가 올해는 기념비적인 일을 하나 더 해냈다. 북구로부터 구비 지원을 받아 추모비를 세우고 그 제막식을 추모제례와 같이 거행한 것이다. 박기수 추모사업회장은 이날 “앞으로도 추모사업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라면서 “정 열사의 묘역이 울산시민들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정 열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새기고 4·19정신을 기리자는 다짐이었다.
4·19혁명의 정신은 ‘자유, 민주, 정의’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4·19정신으로 무장해 미완의 혁명을 완성하는 것은 ‘탄핵 정국’을 ‘희망 정국’으로 바꾸는 시대정신의 발로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