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관광 돋보이게 아산 정주영 동상부터 세웠으면”
"산업관광 돋보이게 아산 정주영 동상부터 세웠으면”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7.03.07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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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윤 울산시 동래정씨 종친회장
 

“해봤어?”라는 도전정신으로 현대그룹을 창업하고 숱한 일화를 남긴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1915. 11. 25~2001. 3. 21). 이분의 동상을 울산에 세우자는 움직임이 ‘2017년 울산 방문의 해’를 맞아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다. 그 중심에는 팔순을 눈앞에 둔 정석윤 울산시동래정씨종친회 회장(78, 한국효행수상자 울산지회장)이 있다.



-동상 건립 움직임, 15년 전에도

아산(娥山=정주영 명예회장의 아호)의 동상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은 약 15년 전, 2002년 8월로 거슬러 오른다. 정석윤 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최초의 제안자는 현대중공업 노조와 중공업 내 정씨연합회였다. 두 그룹은 동상 건립을 울산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정욱장 교수(조각가)에게 의뢰했다. 정 교수는 이때부터 꼬박 3개월간 동상 모형 제작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열정의 대가는 씁쓸했다. ‘무산(霧散)’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없었던 일’로 치부되면서 아산 동상 건립 건은 세인들의 뇌리에서 안개처럼 사라지고 만다.

왜 그랬을까? 당시의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은 중공업의 실세 MJ(정몽준 전 국회의원)의 속내와 무관치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MJ의 부인 김영명 여사는 “전신상(全身像)을 세우더라도 입상(立像) 아닌 좌상(座像)이 좋겠다”는 의사표시까지 했는데도 그랬다. 이곳이 지역구인 울산시의회 천기옥 의원은 “아산 회장의 동상을 현대백화점 옆에 있는 ‘현대예술공원’ 안에 세운다는 이야기가 한창 나돌았다”고 회상한다.

이 무렵, 동상 건립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나중에 정치적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는 MJ의 판단 때문이라는 해석이 조심스럽게 나왔다.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정치 기상도를 되짚어볼 필요를 느낀다.

2002년이라면 MJ가 한일 월드컵 유치에 성공하고 대한민국 축구팀이 4강 신화를 이루면서 그의 국민적 인기가 하늘로 치솟던 시점이었고, 이를 배경으로 대선 출마를 저울질하던 시점이었다. 실제로 MJ는 그 해 8월 18일 전주에서 ‘국민통합’을 명분으로 대선 출마 의지를 천명하기에 이른다. 1992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대선 도전 10년 만의 일이었다.



-現重정씨연합회, 정욱장 교수에 의뢰

동상 건립 추진 과정의 뒷얘기는 정석윤 회장의 기억 속에 아직도 또렷하다. 그는 특히 어긋나 버린 정욱장 교수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워한다.

“정 교수가 중공업 사람들 권유로 아산 동상을 제작하기로 하고 전신상 모형 2가지를 만드는 데 꼬박 3개월이 걸린 모양입디다. 하지만 이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자연히 연구비도 한 푼 못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용역비 없는 용역’을 맡았던 셈이지요, 허허!”

정욱장 교수라면 2005년도에 경남 통영시장의 공식 요청으로 통영의 ‘이순신공원’에 17미터 높이의 충무공 동상을 직접 제작해서 세웠던 주인공이다. 정 회장은 뒤늦었지만 위로도 할 겸 지난달 하순 정 교수와 함께 1박2일 여정으로 통영을 다녀왔다. 이순신공원은 물론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통영 케이블카를 타고 눈요기 관광을 실컷 하고 돌아왔다.

“점심시간이 막 지난 1시 25분쯤 케이블카 표를 샀는데 번호를 보니 ‘5872번’입디다. 그래서 무릎을 탁 쳤지요. ‘아하, 통영시의 관광정책이 드디어 빛을 보고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우리 울산도 올해 방문의 해를 맞아서 잘만 하면 관광도시로 우뚝 서는 계기가 안 되겠나’하고 말입니다.”



-‘관광울산 전도사’ 다 된 정석윤 회장

정 회장은 내친김에 며칠 전 바깥나들이를 다녀왔다. 지난달 하순에 찾은 곳은 울산서도 찾는 이가 많다는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였다.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갓바위’에서 기도를 드렸지요. 정주영 회장의 동상 건립이 꼭 성사되게 해주십사 하고 말입니다.”

어느 결엔가 정 회장은 ‘관광울산 전도사’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사실 그는 관광울산 전도사의 직분에 스스로 충실하려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얼마 전 북구문화원에 특강 나온 신광섭 울산박물관장을 만났을 때도, 울산향교 전교(典校)를 지낸 이세걸 선생을 만났을 때도, 열변 토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때마다 주저 없이 꺼낸 것이 있었다. 전국의 관광객들이 울산에서 ‘산업관광’을 의미 있게 즐길 수 있도록 ‘산업도시 울산’의 상징인물 정주영 회장의 동상을 반드시 세우자는 호소 비슷한 설교(?)였다.

아산의 흉상은 몇 군데 있다. 울산대, 울산과학대와 현대계열사 사옥 같은 곳들이다. 그러나 전신상은 어디에도 없다. 정 회장은, 욕심 같아선 서울아산병원이나 강릉아산병원에는 있는 ‘아산 기념관’을 울산에도 지었으면 하면서도 “우선은 동상부터라도” 하는 생각에 다음 기회로 미룬다.

참고로, 서울아산병원의 ‘아산 기념 전시실’은 5개 테마별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생애와 철학’, ‘경제활동’, ‘사회교육’, ‘공익활동’, ‘아산과 함께’라는 공간이 그것. 아산의 일대기와 함께 생전의 다양한 활동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전시공간인 셈이다. 울산에서는 한때 현대중공업 중심으로 대왕암공원 내 울산교육연수원 자리에 ‘아산 기념관’을 지으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반대여론이 만만치 않아 단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산에 대한 존경심은 ‘무한대(∞)’

아산에 대한 정석윤 회장의 존경심은 무한대(∞)인지도 모른다. 아산을 흠모하는 그의 숱한 말 속에서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존경심이 그로 하여금 동상 건립의 전도사를 자임하기에 이르렀을까?

“폐유조선을 바다에 가라앉혀 서산 간척지 방조제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낸 ‘정주영 공법’ 잘 아시지요? 한 번 가봤더니 감탄사밖에 안 나옵디다. 바다를 육지로 바꾸고, 논두렁을 2미터 플라스틱으로 만들고, 파종은 헬기로 하고.”

‘정주영 공법’이라면 ‘서산 간척지 신화’를 낳았고 세계 유력지에도 소개된 바 있는 아산 특유, 세계 최초의 공법을 말한다. ‘유조선 공법’으로도 불리는 이 공법 덕분에 현대건설은 계획공기 45개월을 35개월이나 줄여 9개월 만에 공사를 끝냄으로써 총 공사비를 2백8십억 원이나 아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의 감탄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약 30년 전, 사우디에 갔더니 ‘코리아’는 몰라도 ‘현대’는 알고 있습디다, 대만에 가보니 정주영 회장의 현대건설에서 건설한 시멘트 두께 2미터짜리 고속도로를 보면서 얼마나 자부심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단단히, 천천히!’라는 우리말 구호도 보았고요.”



-19년간 노모 모시고, 매일새벽 묘소 문안

정석윤 회장은 ‘아산 마니아’이기 이전에 98세에 돌아가신 편모(밀양박씨)에 대한 효행(孝行)과 ‘송도선생’에 대한 효(孝) 선양으로 더 이름난 분이다. 연안송씨 울산종친회에서는 일찍이 그의 업적을 기려 남구 남산의 송도선생 재실 앞에 ‘정석윤공효선양공적비’를 세우기까지 했다.

“어머니께서 연세 80이 되시던 해에 주무실 거처로 가로 13자, 세로 15자짜리 방을 만들고 최고급 가구에다 필요로 하시는 모든 것을 다 갖춰 드렸지요. 저도 같은 방에서 잠을 청하며 가까이서 모시기를 19년간이나 했고요.”

그의 효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노모가 돌아가셨을 때 화장을 하지 않고 북구 효문동 자택에서 ‘6일장’을 지낸 데 이어, 탈상(脫喪)은 1년이 지나서야 했다. 동네 사람들도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모친의 유해는 정 회장의 나이 11살 때 돌아가신 부친의 묘소 곁에 나란히 모셨다. 요즘도 새벽 5시경이면 일어나 1km 남짓 떨어진 부모님의 묘소(효문동 산 30)를 둘러보고 나서야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지금도 그는 모친이 생전에 귀가 닳도록 들려주신 훈계를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있다. “사회생활을 할 때 항상 나를 드러내지 말고, 모범적인 행동과 남을 돕는 일에 솔선수범해야 복을 받는다”는 유언 같은 말씀이었다. 그를 효행의 길로 인도해준 가훈이기도 했다.



-‘하늘이 감동한 효자 송도’ 자료 제공

효에 대한 정석윤 회장의 열의가 빛을 본 작품이 있다. 1만부도 훨씬 더 넘게 찍어낸 ‘하늘이 감동한 효자 송도’라는 책이다.

울산시교육청이 1998년에 펴낸 교육교재로, 이정호(전 다전초등 교장), 김숙자(현 언양초등 교장) 교사를 비롯한 15명의 교육계 인사가 집필, 삽화, 기획, 지도에 동참했다.

당시 김석기 교육감은 발간사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 고장이 낳은 ‘통천지 효자’ 송도 선생은 평소 학문에 힘쓰고 어버이 섬기기에 지성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이 책을 통하여 우리 울산에 송도 선생과 같이 하늘이 감동한 효자가 계셨음을 알고 그 분의 효행을 본받으며 그 얼이 우리의 맥박 속에 길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김 교육감은 글 말미에 정석윤 회장(당시 한국효도회 울산지회장)이 자료 수집과 발간에 적극 협조해 주었다고 밝혔다. 울산향토문화연구회 회원이기도 했던 정 회장은 ‘송도 선생’에 대한 자료 수집이 당시 연구회 회장으로 모셨던 고(故) 김석보 선생(김부조 시인의 부친)의 권유에 힘입은 것이라고 귀띔한다.

이 책의 주인공 ‘송도 선생’은 조선조 세종임금 때 울산 백연암리(지금의 북구 효문동)에서 연안송씨 집안에서 태어나 앞 못 보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그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영조임금 때는 ‘송도 선생 정려각’(현재 울산동헌에 위치)이 세워졌고, 명나라 신종의 귀에도 들어가 신종이 ‘황명어제’와 함께 ‘홍살문’을 하사하는 계기가 된다. ‘효문동’이란 마을이름도 실은 이러한 사실들에서 유래한다.



-“아산기념관에 효도관이라도” 소박한 꿈

2006년, 중구 우정삼거리에 있던 ‘송도 선생 정려각’이 울산동헌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정석윤 회장(당시 ‘송도선생 성역화사업 추진위원장’)의 노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는 “이 어른(송도 선생)에 대해 배워라”며 모친께서 살아생전에 하시던 말씀을 실천에 옮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정 회장은 북구 자택(율동5길15=효문동38-3)에서 5대째 흙을 벗하고 살면서 스스로를 ‘고향 지킴이’라 부른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산 동상 건립의 집념을 한시도 접은 일이 없다.

전국 정씨연합회와 현대중공업 정씨연합회의 동의서명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받은 서명은 정씨종친회에서 450명, 현대중공업에서 800명을 헤아린다.

자신이나 아산은 ‘동래정씨’이지만 굳이 종파에 매달리는 일은 없다. ‘여러 종파가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만지일근(萬枝一根)’의 신념에 충만해 있기 때문일까? 소박한 꿈이 있다면 울산에 아산 기념관이라도 생기면 ‘효도관’ 하나쯤 더부살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글=김정주 논설실장·사진=김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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