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그날의 독립정신을 기억하며
3·1운동, 그날의 독립정신을 기억하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2.2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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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한반도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민족대표 33인은 3월 1일 정오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같은 시각 학생과 시민들은 탑골공원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후 만세 시위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해외에 사는 동포들도 만세 운동에 동참했고, 이는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3월 10일 이후에는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중남부 지방으로 번지면서 전국적 규모로 확산되었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가 소규모 도시와 농촌 지역으로 번져 나간 것이다.

교사와 학생을 비롯한 지방의 지식인들이 중요한 구심점이 되어 선언서 등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여러 지역에 전파했고, 비밀결사대를 조직해 시위를 조직하고 주도했다.

1910년 일제에게 우리의 국권을 빼앗긴 이후, 우리 민족 최대의 목표는 일제로부터 나라의 주권을 되찾는 일이었다.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경찰과 군인을 동원해 시위를 총칼로써 무자비하게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수원의 제암리에서는 마을 사람 전체를 교회 안에 가두고 불을 질러 몰살시켰으며, 유관순 열사처럼 시위를 주동했던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혹독한 고문으로 죽이는 등 일제의 탄압은 극심해졌다.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이 폭발했던 3·1운동은 서간도와 북간도, 블라디보스토크 등 나라 밖에서도 일어났다. 한인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만세운동은 우리 국민들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5·4 운동이, 인도에서는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베트남, 필리핀 등지에서도 3·1운동에 자극받아 독립 의지가 싹트기 시작했다.

3·1운동은 이처럼 한국사는 물론 세계사적 측면에서도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목소리를 높이게 했다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우리 민족의 목표가 완전한 자주독립임을 이 운동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로부터 98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기념식을 거행하고,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행사를 마련한다. 울산에서도 3·1운동을 대표하는 3대 독립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다. 4월 2일 언양을 시작으로 6일에는 병영, 8일에는 남창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산 곳곳에 울려 퍼질 예정이다.

3·1만세 운동은 국권회복과 자주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뜨거운 의지의 표현이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대내외적으로 갈등과 분열이 만연한 어려운 위기 상황에 놓여있다. 98년 전, 대한민국을 지켜낸 선열들의 애국심과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며 현재의 위기 상황을 잘 극복해나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전현빈 울산보훈지청 보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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