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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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2.15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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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그리워하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피천득의 ‘인연’처럼 안타깝고 어긋나는 인연은 작품 속에서만 그지없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

겨울 끝자락 매서운 2월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약속된 날짜에 남도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전인 여행을 계획하면서 설레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혼자 하는 여행의 의미는 조금 다르겠지만 함께 떠나는 사람의 정서와 편안한 친밀감은 더없이 중요하다.

만나자마자 우리들의 수다는 잘 지냈냐는 안부와 함께 시작됐다.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만나 오랜 세월을 함께하고 있는 것일까 싶기도 했다. 철없이 어울려 다니던 여고시절부터 맺어진 인연은 벌써 40년이 지났다. 그동안 고맙게도 큰 감정다툼 없이 서로 배려하며 지금까지 함께 왔으니 다들 어지간히 무던한 친구들이라는 생각도 든다.

결혼 후 각기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힘들고 즐거웠던 이야기를 공유하며 지내는 세월 속에서도 서로 배우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이제 조금씩 어깨의 짐을 내려놓을 즈음 우리는 자신들을 돌아보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여행을 떠나기로 몇 해 전 약속했다.

지난가을은 설악의 단풍을 만끽했다. 홍엽 아래 덩달아 우리의 얼굴이 즐거움에 그렇게 붉어지는 줄도 몰랐다. 동해안 해안도로를 타고 돌아오면서 우리는 어느새 다음 여행을 기약하고 있었다.

여행은 누구와 떠나도 좋은 것이지만 순간순간이 즐겁고 재미진 여행도 있다. 부부가 함께하는 여행은 분신처럼 편안하지만 파안대소하는 일은 드물다. 그냥 같이 공감하고 즐기는 잔잔한 여행이다. 그러나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은 갈래머리 소녀로 처음 만난 그때로 어김없이 돌아간다. 웃고 떠들고 먹고 즐기고…….

오후 무렵 다른 여행지를 거쳐 남해의 ‘독일마을’에 여장을 풀었다. 60년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귀국해서 기거하면서 조성된 마을로 관광명소가 되었다고 하는데, 남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낭만적인 모습의 집과 정원과 동네의 야경은 유럽처럼 아름다웠다. 저녁이 이슥해지자 우리는 독일식 음식과 맥주를 마시며 유럽의 겨울여행인양 낭만을 한껏 즐겼다.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지난 추억을 호명하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밖은 온밤 내내 겨울바람이 세차게 불었지만 카페 안의 즐거운 여흥이 겨울밤의 냉기를 녹이고 있었다.

매서운 겨울한파도 우리의 우정과 열정을 이기진 못했다. 함께하는 시간들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단 며칠의 짧은 여행이지만 서로에게 작은 기쁨과 위로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니까.

서로에게 오래까지 친구로 남아있어 주기로 말없는 약속을 한 우리들은 공유한 추억의 보따리를 끝도 없이 풀어내어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도 웃음이 그칠 줄 몰랐다. ‘빈 둥지 증후군’으로 비어버린 여자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듬어 줄 수 있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인생의 오감을 함께 느끼는 존재-그건 오랜 친구다. 친구에게는 가족에게 갖는 책임감이나 부담감도 없다. 어떤 경우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같이 차 한 잔을 조용히 마셔주기만 해도 위로가 된다.

‘친구 따라 강남 가고 부모 팔아 친구 산다.’는 어른들의 옛말이 빈말은 아닌 듯싶다. 겨울 속 모진 바람길도 아름다운 봄날의 꽃길도 오래까지 함께 가고 싶다.

이정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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