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猶堂 둘러보며 다산 정약용의 일생을 엿보다
與猶堂 둘러보며 다산 정약용의 일생을 엿보다
  • 강귀일 기자
  • 승인 2017.01.19 21: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양주 다산유적지
▲ 여유당.

-다산 정약용 생가, 여유당(與猶堂)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북편에 남으로 돌출된 마을이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이다.

마치 힘찬 두 물줄기를 마중이라도 하는 듯한 형세의 지형이다. 한눈에 명당임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조선 후기 비운의 사상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또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산’은 유배지 강진에서 얻은 호이다. 그러나 다산은 스스로 열수(洌水)라는 호를 많이 썼다. 열수는 한강의 다른 이름이다. 빼어난 지기(地氣)에도 불구하고 다산의 일생은 마을 앞에서 소용돌이치는 두 물줄기만큼이나 거센 세파와 직면한 생을 살았다.

▲ 여유당 편액.

다산은 이곳에서 일생을 보내지는 않았다. 어려서는 벼슬살이를 했던 부친 정재원(丁載遠)의 임지를 따라 다니며 학문을 배우고 익혔다. 정재원은 울산도호부사를 거쳐 진주목사를 지낸 인물이다. 다산이 벼슬길에 나선 것은 22살 때였다. 그리고는 40살 때부터 18년간의 유배생활을 겪었다. 57살이 돼서야 고향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산은 이곳에서 노년기를 보내고 75살에 눈을 감았다.

다산 생가의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노자(老子) ‘도덕경’의 한 대목인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왔다.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자는 뜻이 담겨 있다.

다산은 평생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조심하며 살았다. 당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 다산은 소수파인 남인, 그 중에서도 시파에 속했다. 반대파의 칼날 같은 견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산의 발목을 잡은 것은 천주교였다. 다산은 우리나라 천주교회 설립시기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그러나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하자 다산도 그에 따랐다. 하지만 다산을 아꼈던 정조 임금이 승하하자 다산은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해 들어오는 벽파의 견제에 희생됐다. 가까스로 목숨은 보전해 유배길을 떠났다.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됐다. 셋째 형 약종은 참형을 당했다. 큰 형 약현의 사위는 황사영백서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 거중기.

그러나 다산은 좌절하지 않았다.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강진에서의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한 문집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이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여유당으로 돌아와 저술을 완성했다.

여유당전서는 154권 76책 활자본으로 구성돼 있다. 모두 7집으로, 제1집은 시문집(詩文集), 제2집은 경집(經集), 제3집은 예집(禮集), 제4집은 악집(樂集), 제5집은 정법집(政法集), 제6집은 지리집(地理集), 제7집은 의학집(醫學集)이다.

여유당전서가 활자화 된 것은 1930년대이다. 일제강점기 이 땅의 선비 김성진(金誠鎭), 정인보(鄭寅普), 안재홍(安在鴻)이 편찬해 세상에 내놨다. 민족문화사의 위대한 자산을 묻어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여유당 일대는 다산유적지로 조성돼 있다. 다산기념관과 다산문화관, 실학박물관 등이 이곳에 있다.

▲ 실학박물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다산의 산소는 여유당 뒤편 언덕에 있다. 언덕 아래에 묘비가 있다.

다산은 유배에서 돌아와 4년 뒤 회갑을 맞았다. 다산은 이때 자신의 묘지명을 지었다. 묘지명은 망자를 잘 아는 선비가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다산이 유배지에서 겪었던 18년 세월을 알 수 있는 선비는 없었다. 다산은 그것을 우려해 스스로 묘지명을 지어뒀던 것이다. 혹시 나중에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선비가 나타나면 어찌됐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폐족이 된 다산이 더 이상 걸출할 선비와 교유할 수는 없었다. 묘비에는 다산이 지은 묘지명이 그대로 실려 있다. 다산이 지나온 파란의 삶이 비문에 실려 있어 읽는 이를 숙연케 한다.

▲ 다산 묘비.

1836년 2월 22일 다산은 부인 풍산 홍씨와 회혼일을 맞아 자손과 친척들이 모인 가운데 모진 세월을 뒤로 하고 잠들었다. 다산은 회혼일을 맞아 시 한 수를 남겼다. 이 회혼시가 다산의 마지막 저작이 됐다. 다정다감한 정서가 담긴 소박한 시 한 수가 위대한 선비 다산 정약용의 웅변처럼 가슴을 울린다.

六十風輪轉眼翩(육십풍륜전안편)

濃桃春色似新婚(농도춘색사신혼)

生離死別催人老(생리사별최인로)

戚短歡長感主恩(척단환장감주은)

此夜蘭詞聲更好(차야란사성경호)

舊時霞 墨猶痕(구시하피묵유흔)

剖而復合眞吾象(부이부합진오상)

留取雙瓢付子孫(유취쌍표부자손)

육십 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지나갔건만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도다.

나고 죽는 것과 헤어지는 것이 사람 늙기를 재촉하건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노라.

이 밤 목란사 소리 더욱 좋고

그 옛적 치마 먹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도다.

나뉘었다가도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 모습이었으니

한 쌍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기노라.

글·사진 = 강귀일 기자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