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18’과 접미어 ‘-리스트’
숫자 ‘18’과 접미어 ‘-리스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1.10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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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유행어는 생명체다. 생성과 소멸을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살아 꿈틀거리는 생성의 단계인 탓인지 ‘조기대선(早期大選) 정국’과 ‘최순실 게이트’는 수도 없이 많은 말과 유행어를 끝도 모르게 만들어내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18’이란 숫자와 ‘-리스트’란 접미어다.

‘18번’ 하면 언뜻 떠오르는 것이 ‘애창곡’이다. “자네 18번이 뭔데?” “응, 내 18번은 ‘무조건’이야.”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이때의 ‘18번’은 말하는 이도 듣는 이도 싫어할 이유가 없다.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 혹은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있다. 듣기로는 ‘18번’이란 말이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더불어 일본에서 건너온 왜색 짙은 유행어이기 때문이다.

호사가들에 따르면 ‘18번’은 일본 에도 시대 이즈모 지방의 무녀(舞女, 여자춤꾼) ‘오쿠니’가 창시한 일본의 전통 극예술 ‘가부키(歌舞伎)’와 연관이 있다. 가부키는 나중에 풍기문란을 이유로 남자배우가 그 맥을 이었고, 마침내 ‘이치카와 단주로’라는 명배우를 출현시키기에 이른다. ‘18번’이란 말은 이 이름난 배우의 집안에 내려오던 인기 하나 대단하던 18번째(혹은 18가지) 작품을 일컫는 ‘가부키 주하치반(歌舞伎 十八番)’이란 말에서 나왔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18’이란 숫자는 그러나 2017년 1월의 ‘조기대선 정국’과 맞물리면서부터 그 의미가 달라진다. ‘문자폭탄’과 함께 ‘18원 후원금’이란 유행어가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18’은, 발음 나는 그대로, 우리네 욕지거리와 연관이 있다. ‘18원 후원금’ 역시 순수하게 건네어지는 정치후원금이 아니라 “엿 먹어라!”는 식의 비아냥거림의 성격이 짙다. 혹자는 ‘18원 후원금’을 “비판하려는 정치인의 후원금 계좌에 욕설과 경멸의 의미를 담은 ‘18원’을 입금하는 일종의 후원금 테러”라고 규정짓는다.

‘18원 후원금’은 민주당의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에서 작성한 <개헌 논의 배경과 전략적 스탠스 및 더불어민주당의 선택>이란 보고서가 촉발시켰다. 이 보고서를 비판한 정치인들을 겨냥한 것이 ‘문자폭탄’과 ‘18원 후원금’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태에 대한 D일보의 비판적 기사를 신호탄으로 정치권에서는 날을 세운 공방이 이어졌다.

국민의당 이용호 의원은 10일 오전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한편에선 문자폭탄과 18원 후원금이 보내지고, 다른 한편에선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에 대한 구미 폭력사태가 벌어졌다”며 이념과 지지세력 간 적대시 조짐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그는 이어 “극단적 소수가 이를 부채질하고 있어 우려스럽다”며 문 전 대표 지지층과 박 대통령 지지층을 싸잡아 비판했다. 이에 앞서 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8일 ‘18원 후원금에 대하여’라는 장문의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려 눈길을 끌었다. 그는 “정치인에게 지지나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고 바람직한 일”이라면서도 “18원 후원금과 문자폭탄 세례는 자칫하면 정권교체에 치명적인 장애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또한 “반대라기보다 경멸의 표시가 분명한 18원 후원금이 집단으로 입금되거나 비슷한 내용의 문자가 폭탄처럼 쏟아지면 누구라도 감정이 상할 수밖에 없다”고 역기능을 지적했다.

‘-리스트’라는 접미어도 ‘최순실 게이트’ 바람을 타고 유행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귀에 익은 ‘블랙리스트’는 물론이고 아직은 다소 귀에 선 ‘화이트리스트’, ‘블루리스트’에다 심지어는 ‘적군리스트’라는 말도 내로라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그러자 민주당 윤관석 수석대변인이 9일 브리핑을 통해 몇 말씀을 내뱉었다. ‘리스트 공화국’이란 표현까지 구사해 가며 박근혜 정권을 겨냥해서 한 발언이었다. 그는 “박근혜 정권은 리스트 융성 정권이었나? 야만의 ‘데스노트(death note)’ 작성자, 컨트롤타워의 최고책임자는 누구인가?”라고 꼬집었다. 이어 “블랙리스트에 이은 ‘적군리스트’, ‘블루리스트’의 존재가 거론되고 있다. 정치검열과 표적관리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며 “블랙리스트를 지시한 적도, 본 적도 없다던 조윤선 장관이 블랙리스트 외에 ‘적군리스트’를 별도로 작성하고 관리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힐난했다.

말이 나온 김에 ‘예술인 블랙리스트’ 건으로 구설수에 오른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얘기도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를 느낀다. 다음은 9일 오후에 열린 국회 국정조사특위 청문회 증인신문에서 국민의 당 이용주 의원이 조윤선 장관으로부터 사실상의 시인을 받아내는 장면이다. “문건으로 된 블랙리스트가 존재하는 게 맞습니까? Yes, No로 대답하세요.” “휴∼. ‘예술인의 지원을 배제하는 명단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조 장관의 항복성 답변이 이 의원의 ‘18번째’ 추궁 끝에 나왔다는 것도 참 흥미로운 일이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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