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닭들을 위하여
건강한 닭들을 위하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1.05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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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서 살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닭 키우는 일이었다. 철따라 보신용으로 닭 잡아 백숙을 고아먹는 것이 재미가 쏠쏠해서도 그렇지만 막 낳은, 그 따뜻한 달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기도 했다. 익어서 따뜻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어서 따뜻한 달걀 말이다.

서너 살 때는 바로 옆집 삽짝을 지나가기가 두려웠다. 큰 장닭이 지나가기만 하면 쌍 날개를 펼쳐들고 달려 나왔다. 머리에 우뚝 솟은 벼슬과 그 아래 너덜거리는 붉은 벼슬은 물론 땡그라니 쳐다보는 눈동자도 아주 무서웠고 당당한 위엄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조선 후기 유학자 하달홍(河達弘)은 「축계설畜鷄說=닭을 기르는 이유」을 지어 이렇게 설명했다. “닭은 기를 만한가? 그렇다. 옛사람은 닭이 오덕(五德)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머리에 관을 썼으니 문(文)이다. 발에 며느리발톱이 있으니 무(武)다. 적을 보면 싸우니 용(勇)이다. 먹을 것을 보면 서로 부르니 인(仁)이다. 어김없이 때를 맞춰 우니 신(信)이다. 닭은 기를 수 없는가?…(중략)…하지만 다섯 가지 덕 말고도 기를 만한 이유가 두 가지 더 있다. 내가 산속 집에 살며 일이 없어 어미닭 두 마리를 길렀다. 알을 품는 것에서 함양하는 이치를 깨닫고, 부리로 쪼고 알을 안는 데서 변화를 관찰하면서 뜻을 깃들이는 방편으로 삼는다.” 세심한 관찰이지 않을 수 없다. 고미술을 수집, 전시하는 간송미술관 관장은 사숙하는 제자에게 ‘닭 기르기’를 의무화했는데 이는 닭이 가진 품성을 배우라고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 닭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살아있는 닭들은 보이지도 않지만 닭은 넘쳐난다. 머리를 좌우로 똘래거리며 뒤뚱뒤뚱 걷는 닭은 우리 머릿속에서 잊혀지고 있다. 이제 ‘닭 한 마리’는 털이 다 뽑혀 스티로폼에 누운, 비닐 랩으로 포장된 닭이거나 튀김 닭이지 신성한 혼인 초례상(醮禮床)을 지켜보는 닭은 아니다.

세상이 아름답다고만 생각하거나 아름다운 시구만을 외는 사람들에게 감옥 같은 ‘닭공장’으로 데려간다면 엄청난 충격을 받을 것이다. 닭들은 어둡고 냄새나는 실내, 한 마리당 A4 복사지 한 장의 공간에서, 주는 사료나 물을 먹고, 사료투입 대비 무게가 늘어가는 분기점 직전에 팔려가고 나가는 순간 죽는다. 산란 닭은 갇혀 일생동안 알만 낳다가 죽는다.

닭은 생각보다 영민하고 예민한 동물이이서, 뒤에 누가 있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닭들이 고개를 자주 돌리는 것은 다 이런 경계행동이다. 예민하기에 스트레스에 약하다. 달걀을 얻는 산란계 사육장은 낯선 방문객이 오면 산란율이 급격히 떨어진다. 그래서 닭들이 자랄 때만이라도 ‘닭들의 천국’을 만들어주자는 자연농업 양계는 낯선 이들을 함부로 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수많은 동물들의 고통의 바벨탑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로 봐야 바꿀 수 있다.

‘닭의 해’지만 지금 세상은 조류인플루엔자(AI=Avian Influenza) 때문에 닭들에겐 홀로코스트(대량학살) 시대다. 오래전부터 반복되는 구제역으로 살(殺)처분을 담당한 공무원들에게는 2차 피해인, 심각한 수준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증상이 생겼다. 상담을 받은 참여자들은 돼지만 봐도 살처분 현장이 떠오르고 불안감과 불면증, 대인기피증에 시달린다고 호소했고, PTSD 증상이 오래가면 자괴, 우울 증상이 나타나 심지어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수의직 공무원은 이렇게 증언했다. “한 동료는 새끼돼지가 포클레인에 몸이 잘려 두 동강 나는 모습이 지금까지도 눈앞에 아른거린다고 합니다. 동물의 비명이 환청으로 들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여 봤을 법한 사람들이 살처분에 동원된 뒤 식음을 전폐한 일도 숱하게 봤습니다.”

나치의 유태인 대량학살에서 생존자로 살아남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강연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개를 죽이기가 쉽고, 개보다는 쥐나 개구리를 죽이는 것이 쉬우며, 벌레 같은 것을 죽이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즉 문제는 시선, 눈동자”라고 말했다. 희생자에게서 주체적이거나 공격자를 알아보는 듯한 시선을 발견할 때 가해자는 동정심, 죄악감으로 커다란 정신적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치는 유대인의 ‘살처분’을 맡은 SS대원의 작업을 쉽게 해주기 위해 학살수용소 재소자들을 ‘분뇨 범벅’으로 만들었다.”

역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닭을 예사로 살처분 생매장하는 문화는 돼지도 소도 예사로이 하고 결국에는 모든 생명 가진 존재, 마침내는 사람 인권, 생명마저도 경시하는 풍조를 만들지 않을까? 새해에는 닭 한 마리 먹을 때도 본인이 직접 닭 모가지를 비틀어 잡는 책임감을 가지려 애쓰자. 어떻게 하면 좀 더 너른 마당을 뛰어다니며 건강하게 길러지는 닭, AI에도 걸리지 않는 사육환경을 만들 것인가도 생각하자. ‘꿩 대신 닭’이라지만,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꿩 대가리 처박듯 살아가는 것을 배우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새해 첫날부터 정유년(丁酉年) 새해가 밝았다고 떠들어대는 통에 깜빡 속았다. 정유년의 시작은 사실 2017년 1월 28일부터다.

<이동고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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