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 丁酉年의 울산
60년 전 丁酉年의 울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7.01.04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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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갑자(甲子) 전 정유년(丁酉年)은 1957년이었다.

이 때 울산은 아직 특정공업지구로 지정(1962년)되기 이전의 울산군이었다. 울산읍과 방어진읍 등 2개 읍과 15개 면으로 구성돼 있던 시기였다. 6·25 전쟁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 전이어서 극심한 민생고에 허덕이던 시기였다. 특히 전년에 발생했던 풍수해로 극심한 보리고개를 넘겨야 했던 해였다. 당시 신문에는 3월부터 울산의 절량농가(絶糧農家) 관련 소식이 보도되고 있다.

가톨릭구제회와 외국 구호단체 등에서 구호양곡과 의복 등을 보내줬다는 기사도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언 발에 오줌누기’에 지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재와 수재도 잇따랐다. 2월에 대현면 납도리 야산에서 화재가 발생해 휘발유 2천 드럼이 불에 타버렸고 강동면 대안리 뒷산에서도 대규모 산불이 났다. 납도 화재로 의용소방대원 한 명도 목숨을 잃었다는 기사도 보인다.

8월에는 태풍이 울산지역을 강타했다. 통영으로 상륙한 태풍은 부산과 울산을 거쳐 포항으로 빠져나가면서 치명상을 남겼다. 대현면 일원의 배 과수원에서는 수확을 앞둔 배 7할이 떨어지는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수재복구를 전적으로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육군은 11월 태풍피해가 심각한 울산과 양산, 김해 등 경남지역 출신 장병들을 조기 제대시키는 방침을 발표했다니 그 피해 정도가 가늠이 된다.

이런 가운데도 8월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린 전국일주 자전거 경기대회 선수단이 울산을 통과했다. 연도의 군민들은 울산을 지나는 은륜 행렬을 열렬히 응원했다.

5월에 발족한 천주교 부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울산 출신 최재선(崔再善, 1912~20 08) 주교가 부임했다. 최 주교는 상북면 길천리에서 태어났다.

문화행사 소식도 보인다. 8월에 울산읍 가로수 다방에서 김지향(金芝鄕) 시인의 시화전이 열흘 동안 열렸다. 김 시인은 양산 출신으로 홍익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훗날 한세대와 한양여대 교수를 지냈고 한국크리스찬 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한 문인이다.

12월에 절미저축장학회(節米貯蓄奬學會) 출범을 알리는 신문광고가 눈길을 끈다. ‘근고(謹告)’라는 제목과 함께 국한문체로 실린 이 광고는 울산태화서원유림일동과 울산육영장학회, 표암공(瓢巖公)후손이씨(李氏)화수회 명의로 나왔다. 경주이씨 이용범(李龍範)씨가 거액을 희사해 장학회를 발족하게 됐다는 내용이다. ‘농촌을 파멸에서 구출하는 역할의 수고를 자임하겠다’는 결기가 읽는 이를 숙연케 한다.

당시 신문에서 울산 관련 기사를 살펴봤다. 불과 60년 전이지만 지금과는 천양지차의 세상이다. 그 동안 많이도 변했다. 그 가운데서도 울산은 단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다시 정유년을 맞는다. 그 어느 해보다도 불확실성이 앞을 가리는 해이다. 정치적 불안, 지역경제의 위기, 주변국제정세의 불안 등 그 어느 한 분야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60년 전 울산 지역사회는 간난고초를 겪으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상부상조의 정신이 서로에게 위안이 됐다. 시화전을 열며 고단한 삶을 달래기도 했다.

그에 앞서 420년 전 정유년(1597년)에는 울산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군과 명군 그리고 왜군 8만여 병력이 울산을 지나갔다. 전투의 승패와 관계없이 지역사회 민초들의 삶은 초토화됐다. 울산지역사회의 근간은 이 전쟁 이후에 재편됐다.

하지만 울산의 문풍은 오히려 이 전쟁 이후에 진작됐다. 폐허 위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설계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해에 맞고 있는 난관도 슬기롭게 헤쳐 나가야 하겠다.

<강귀일 취재2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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