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제국’
‘영원한 제국’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1.01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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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년(丙申年)이 마침표를 찍던 날, 이목을 집중시킨 뉴스가 하나 있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을 다루고 있는 특검이 긴급체포권을 발동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따끈따끈한 뉴스는 정유년(丁酉年) 꼭두새벽에도 화제의 꼬리를 물게 했다.

‘긴급체포’ 대상은 류철균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 교수. 그에게는 업무 방해와 사문서 위조, 강요 등 3가지 혐의가 한꺼번에 적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하루 전(12월 30일) 저녁 7시쯤 특검에 불려가 비공개 밤샘조사를 받았고, 11시간 만인 31일 오전 6시쯤 쇠고랑을 찼다. 특검 관계자는 긴급체포 이유를 ‘증거인멸의 우려’라고 했다.

류 교수에게 씌워진 구체적 혐의는 ‘비선 실세’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를 무리하게 도와줬다는 것이다. 정 씨의 1학기 기말고사 답안지를 자신의 조교에게 대신 써내도록 강요했다는 얘기다. 정 씨는 류 교수 담당인 ‘영화 스토리텔링의 이해’라는 과목의 수강을 신청해 놓고도 기말고사 기간에는 독일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도 답안지는 제출됐고, 학점도 나왔다. 이 과정에 ‘최순실을 안다’는 류 교수의 입김이 작용한 단서를 특검이 포착했다. 조교의 진술이 결정적 올가미였다.

긴급체포 직후의 반응들이 자못 흥미로웠다. ‘프레시안’은 기사 첫머리를 “정유라 씨가 학점을 거저 딴 배경에는 <영원한 제국> 작가가 있었다”는 글로 장식했다. 한 네티즌은 “내 신선한 대학교 1학년 때 영원한 제국 읽느라 돈과 시간 투자한 거 억울하다”는 글을 올렸다. 기사 제목을 연합뉴스는 <’영원한 제국’의 몰락>이라 달았고 ‘녹색경제’는 <최순실과의 영원한 제국이었나?>라고 비꼬았다. 박선규 전 청와대 대변인(2009.08∼2010.07)은 한 종편방송에서 ‘엘리트의 추락’이라며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해를 돕자면, <영원한 제국(1995)>은 100만 부 넘게 팔린 ‘이인화’의 작품이고, 작가 이인화는 대구 출신 류철균 교수의 필명(筆名)이다. 조선조 22번째 임금 정조의 독살설을 모티브로 한 역사추리소설 <영원한 제국>을 두고 한 평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조와 신권정치를 주장하는 노론 사이에서 작가는 은근히 정조 편에 서며 절대적 왕권정치를 정당화한다. 그러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10월 유신이 필연적이었다는 자신의 역사인식을 드러낸다. 정조가 이른바 ‘홍재 유신’을 실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탓에 민족사가 160년 후퇴했고 그 결과가 박 전 대통령의 ‘10월 유신’이라는 것이다.”

여하간 특검의 긴급체포를 신호탄으로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류 교수의 신상 털기에 나섰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8년 ‘계간 문학과사회’에 본명(류철균)으로 양귀자 소설평론 ‘유황불의 경험과 리얼리즘의 깊이’를 기고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1992년에는 데뷔작 소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를 필명 이인화 명의로 발표하고 이에 대한 평론을 본명 류철균 명의로 쓴다. “필명과 본명을 번갈아 쓰며 자기 작품에 대해 ‘셀프 평론’을 하는 기행”이라는 비판은 바로 이를 두고 나왔다.

이 소설은 그해 그에게 작가세계문학상을 안겨준다. 하지만 곧바로 “공지영과 무라카미 하루키 등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의혹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1997년에는 3부작 소설 ‘인간의 길’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대의 영웅으로 묘사해 “군사독재를 미화하고 국가주의를 지지하는 역사관을 소설 속에 드러냈다”는 쓴소리도 듣는다.

어쨌든 류철균 교수의 ‘영원한 제국’은 그를 이화여대 전임강사→교수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그러나 이 시점, 긴급체포의 불명예가 그를 옥죄고 있으니 그에게는 독배(毒盃)인지도 모른다. 세밑에 얻은 한 가지 교훈은, ‘영원한 제국’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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