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아, 철아, 우리 철아”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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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10.14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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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당시 울산의 의사 모두 16명 불과
함께 일하던 의사들 몇년 뒤 연합병원 떠나

동강선생 언짢아 하는 기색없이 개업 도와줘

유병철(울산의원) 원장을 만났다. 1970년 울산의 ‘서울연합병원’에 정형외과 의사로 부임하면서 동강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울산의 의원은 모두 16명에 불과했다.

인구 약 40만명에 16명의 의사는 너무나 의료혜택이 빈약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이어서 유병철 원장이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강선생과 사전에 면담도 갖지 않고 충남대학교 의과대학 조교수로 떠나는 친구와 그냥 인계인수하듯이 병원으로 들어와서 약 4년 동안 연합병원에서 열심히 일하였다.

부원장의 직책이 주어지면서 책임감도 컸었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배경은 동강선생이 같이 일하는 의사들에게 병원 원장으로서 조금도 업무에 관해 잔소리를 하거나 채근하는 일 없이, 더구나 화내는 일 없이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다. 유원장의 이야기를 빌리면, 의사들의 생리가 남한테 간섭받기를 무척 싫어하는 것도 있어서 이것을 고려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동강선생 자신이 남한테 일을 맡기면 책임과 함께 믿어버리는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병원경영 자체를 어수룩하게 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의사 월급이 25만원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성과급’에 해당하는 과외 돈, 월급에 버금가는 액수를 지급하며 보다 친절하게, 보다 성실하게 환자를 대하여 병원이 발전하게 유도하였다.

많은 환자를 진료하면 그만큼 성과급이 돌아오도록 한 것이다.

그때 연합병원은 내과, 산부인과, 정형외과, 이비인후과뿐이었다. 내과에는 동강선생 말고도 한 분이 더 있었다.

현대중공업의 조선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그만큼 산재사고도 많아지고 연합병원의 업무도 눈 코 뜰 새 없이 많아졌다. 물론 울산의 유입인구도 그만큼 많아졌다. 특히 정형외과를 보고 있던 당시 유부원장은 하루에 150명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수술은 오후 5시 이후로 미루어져야 했다.

이렇게 동강선생과 함께 일했던 의사들은 몇 년간의 경험을 쌓은 뒤 개업을 하고 연합병원을 떠났다. 동강선생은 한 번도 언짢아하는 기색 없이 개업을 도와주었다.

1975년경에는 약 20명이 연합병원을 거쳐 울산에 의원을 개업했다. 열악한 울산의 의료 환경에 얼마나 큰, 보이지 않는 공헌을 한 것인가. 한마디로 동강선생은 딱딱하고 엄한 의사라기보다는 ‘감성(感性)이 풍부하면서도 외로움을 잘 타던 문학청년’이라고 회상한다.

2007년 신년사에, ‘우리의 고객을 사랑하고, 우리의 병원을 사랑하고, 우리의 자신을 사랑합시다. 서로 화합하고, 신뢰하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언제나 밝은 내일만 있을 것입니다.’라고 다짐을 한다. 동강의료재단 이사장의 딱딱한 경영 마인드가 아니라 인간미가 넘치는 문학청년의 운율이 스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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