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규(淸規)와 누규(陋規)
청규(淸規)와 누규(陋規)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10.30 21: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살이가 각박하고 힘들수록 가족, 가까운 친구 등은 더 소중해진다. 믿을 구석은 이들밖에 없다는 생각이 절로 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가 그렇다. 잘 나가는데 친구가 없을 수가 없다. 사람이 모이고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힘들고 어려우면 곁에 있는 사람들도 흩어진다. 세상사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이 어려울 때 옆에 있어 주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들이다.

가족은 피붙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치자. 그러면 친구는 누구인가? 친구는 어떤 관계로 맺어져 있는가?

‘뜻을 같이하고 마음을 나누는 동지’라는 의미의 친구를 먼저 생각해본다. 이런 사람은 평생 친구다.

1년 한두 번 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한결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긴 여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다. 힘들수록 생각나는 친구는 뿌듯한 자산이나 다름없다.

주변에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 꼭 재물이 많아서는 아니다. 많고 잘 쓰면 더 좋다. 하지만 많으면서 잘 쓰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친구는 없어도 잘 쓴다. 꼭 돈을 쓴다는 것보다는 마음 씀씀이가 풍요롭다.

누규(陋規)라는 규칙이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 형제간에 우애해라,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마라는 등의 일반적, 보편적 도덕이 청규(淸規)인데 반해 누규란 구체적인 조목보다는 마음씀씀이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규칙이다.

이를테면 뒷골목에서 많이 적용된다.

뇌물을 바치거나 받는데도 엄연한 격식이 있고 싸움판에도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기 마련이다. 도둑에게는 도둑들에게만 통하는 규율이, 노름꾼에는 그들 세계의 독특한 규칙이 따로 있다.

바로 이런 것이 누규다. 어떤 의미에서 청규보다도 더 엄격할 뿐더러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되는 절제 위에 세워져 있다.

중국 정치가 어지러웠을 때는 어떤 청규보다도 이 누규가 까다롭게 적용되고 구성원 사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해 왔다. 흔히 범죄시하는 행위 자체보다는 그 행위의 기본 도덕성이 파괴될 때 사회 전체에 파급되는 정도가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누규가 무너지면 반란이 일어나고 혁명이 뒤따른다.’

중국의 정치에서는 누규를 이렇게까지 받아들인다. 이러한 누규를 가장 잘 이끈 사람이 바로 당 태종 이세민이다. 그렇게 만든 세상이 ‘정관의 치’라고 불리는 태평성대다.

‘의리 없는 놈!’이라고 낙인찍히면 그들의 세계에서는 떳떳이 행세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구성원으로 인정받기조차 어려웠다.

동시에 일반 사회에서도 누규를 범한 인물은 손가락질당하기 일쑤였다.

상대에게 ‘심복(心腹)한다’고 하면 상대가 누구이든지 간에 청규보다는 누규에 가까운 마음으로 절대적 신뢰, 무한에 가까운 복종심이 그 바탕에 깔려 있다.

먹고 살기가 힘들수록 세상살이는 더욱 험악해지고 소요스럽다.

이럴 때 술 한 잔 기울이며 어깨동무를 나누는 친구, 우리들만의 세계를 지켜가는 친구, 그런 친구들이 몸살 나게 그리운 것이다.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는 잃어버린 꿈과 희망이 되살아나는 묘약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구중궁궐 청와대를 둘러싼 암투와 이전투구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최순실은 누규를 어겼고. 대통령은 누규를 외면한 것은 아닌가?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친구도 아니고 심복도 아니다. 국민들은 두 사람에게 국정을 농단하고 국정을 농단시킨 잘못이 있다면 참회하고 반성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또한 법과 원칙에 따라 국민의 심판을 겸허한 자세로 기다려 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김진영 정의당 울산시당 위원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