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주 문화’ 유감
‘폭탄주 문화’ 유감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8.2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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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시로 승격되던 해의 어린이날로 기억된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된 저명인사 A씨의 고향(울산) 방문 소식이 들려왔다. 갑작스런 소집령(?)이 울산지역 법무부 산하 전 기관장에게 떨어졌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어린 자녀가 서울에 있던 젊은 검사들까지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어린이날을 본의 아니게 근무지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환영회식 분위기는 해가 있을 때부터 무르익어 갔다. 회식장소는 북구 정자에서도 가장 잘 나간다는 E횟집. 준비해 간 양주와 횟집의 소주, 맥주가 일정 비율로 섞이더니 맥주잔이 시계방향으로 돌아갔다. 알코올에 약한 기관장 몇 분은 일찌감치 건넌방을 도피처로 삼아 쥐 죽은 듯 드러누웠다. 급기야 누군가가 노래방기기에 손을 다쳐 구급차를 부르는 일까지 생겨났다. ‘폭탄주 향연’이 부른 예기치 못한 불상사였다.

연합뉴스가 21일 육군 소식을 하나 전했다. “폭탄주 돌리기, 음주 강요하기, 2∼3차 가기, 이제는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악습입니다!” 금요일인 지난 19일 일과를 마친 시각, 육군 모 부대 앵커의 목소리라 했다. 사연인즉, 육군이 지난 1일부터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일과 종료와 함께 부대별로 내보내는 ‘일일방송’에 과도한 음주의 자제를 촉구하는 내용을 반드시 넣도록 했다는 것. 잘못된 음주문화를 뜯어고치겠다는 의지의 캠페인이라 했다.

연합뉴스는 ‘3대 금지사항’도 소개했다. ‘음주강권’, ‘음주운전’, ‘이성동반 2차 회식’ 등 3가지가 그것이다. 위계질서가 강한 군 조직에서 상급자의 강권이 과음의 원인이라는 문제의식과 음주로 인한 사건사고를 근절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 육군은 ‘10대 실천사항’도 제시했다고 했다. ‘돌아가며 원샷 및 건배 하지 않기’, ‘술을 마실 때 물을 자주 마시기’, ‘음주 이후 2∼3일은 술 마시지 않기’도 그 속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일그러진 폭탄주 문화’가 어디 군대뿐이겠는가. 법조계는 물론 공직사회, 교육계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는 아주 깊고 대단히 넓다. 그러니 아무리 ‘추방 운동’ 운운한들 금세 수그러들 것 같진 않다. 폭탄주는 몸에 해로울 뿐더러 사회의 모든 ‘정상’을 ‘비정상’으로 돌리는 괴력이 있는데도 술꾼들은 쉽게 뿌리치지 않는다. 청와대를 비웃는 청개구리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러기에 ‘폭탄주 추방 운동’은 정부가 앞장서는 게 제격일지 모른다. ‘금연 운동’에도 앞장선 정부가 아니던가?

‘폭탄주 원조론’엔 몇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부두노동자’ 설이다. 경제공황 시기인 1930년대 초 가난한 미국 부두노동자들이 싼값에 취할 요량으로 맥주에 럼주를 타서 마신 것이 그 시초라는 것. 다른 하나는 ‘시베리아 벌목노동자’ 설이다. 제정러시아 때 시베리아로 유형 간 벌목노동자들이 추위를 이기려고 보드카에 맥주를 섞어 마신 것이 그 시초라는 것. 폭탄주를 ‘악성 칵테일’이라는 한 호사가는 이런 주장을 편다. “폭탄주가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볼셰비키에게까지 확산됐고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즉 공산당에 참여한 항만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폭탄주(=위스키+맥주) 문화가 생겼고 이는 또다시 미군들에게 전파됐다. 국내에서는 60~70년대 미국 웨스트포인트 등에 유학 갔던 군인들이 돌아와 장교를 중심으로 확산됐다는 것이 정설로 꼽힌다.”

그는 이런 말도 남긴다. “이 악성 칵테일은 뭐든 빨리 해치우려는 한국 사람의 취향에 딱 들어맞으면서 멀고 먼 이국땅에서 뿌리를 내렸다. 우리나라에선 이상하게도 노동자가 아닌 사회지도층의 단결 과시용으로 발전돼 왔다. 군사정권 시절엔 선후배 장교들이 회식자리에서 마셨고, 법조계 사람들 사이에도 폭탄주가 일반화되더니, 나중엔 웬만큼 한다하는 사람들은 다 마셔대는 현상이 생겼다.” 잔을 돌릴 때 ‘폭탄주=볼셰비키주’란 상상, 한번쯤 해보면 술기분이 어떨까?

<김정주 논설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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