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과 김병지
울산과 김병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7.20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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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의 전설 김병지(46) 선수가 은퇴를 선언했다.

김 선수의 은퇴 소식이 알려지자 울산구단은 그의 은퇴경기를 치러주겠다고 발표했다.

은퇴경기는 오는 9월 18일 울산문수경기장에서 열리는 포항과 153번째 ‘동해안 더비’로 결정됐다.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일이다.

김 선수의 최종 소속 팀은 전남이다. 그리고 경남, 서울, 포항에서도 선수생활을 했다. 울산에서는 1992년부터 2000년까지 9개 시즌을 뛰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의 은퇴경기를 치러주겠다고 앞을 다퉈 결정한 팀은 울산이다.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김병지 선수는 ‘울산에서 떠오른 별’이다. 대부분의 스타플레이어들은 유소년 시기부터 두각을 나타낸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김 선수는 울산에 연습생으로 입단할 때까지는 철저한 무명이었다. 무명의 그를 발탁한 이는 차범근 감독이었다. 현대호랑이축구단이 울산을 연고지로 삼아 정착한 것은 1990년 시즌부터이다. 차 감독은 독일 생활을 마무리하고 귀국해 1991년부터 울산의 사령탑에 앉았다. 이 해에 김병지는 연습생으로 입단한다. 정식 데뷔는 이듬해인 1992년이다.

그런데 김 선수는 연습생 신분으로 울산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경기를 1991년에 치렀다. 이 해 7월 27일 울산공설운동장에서 있었던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축구팀과의 친선시합이었다. 이날 일본에서는 한일축구정기전이 열렸다. 그래서 대표팀으로 출전한 걸출한 주전선수들이 빠진 자리를 신인선수들이 채워 경기를 치르게 됐다. 당시는 J리그가 출범하기 전이었다. J리그가 출범하면서 ‘우라와 레즈’라는 팀으로 프로화된 미쓰비시중공업팀은 아직 아마추어 팀이었다. 김 선수는 부동의 국가대표 골키퍼였던 최인영 선배의 빈 자리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경기는 시종 울산팀이 한 수 위의 기량을 보이며 지배했다. 골키퍼로서도 별로 할 일이 없었다. 경기가 그렇게 3대 0으로 끝나려하자 관중들은 오히려 미쓰비시팀을 응원하기까지 했다.

사실은 응원이라기보다는 측은지심에서 발로된 동정이었다.

그런데 경기 종료 직전에 미쓰비시팀이 페널티킥 찬스를 얻었다. 관중의 응원(?)에 힘입은 키커의 킥을 무명의 골키퍼가 펀칭으로 막아냈다. 인플레이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공을 쇄도하던 일본 선수가 재빠르게 슛팅으로 연결했다. 무명의 골키퍼는 이 공마저 잡아냈다. 관중석에서는 감탄성이 나왔다. 이 선수가 바로 김병지였다.

데뷔 후에도 김 선수는 최인영이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만 출전할 수 있었다. 최인영은 1994년 미국 월트컵 이후 은퇴 수순에 들어갔다. 1998년 프랑스에서 열렸던 월드컵 대표팀의 골키퍼는 김병지였다. 당시 대표팀 감독도 차범근이었다. 차 감독은 네델란드와의 예선전에서 5대 0으로 패한 책임을 지고 대회 도중 경질됐다.

김병지도 예선 3 경기에서 9 실점을 한다. 참패였다. 하지만 외신은 김병지의 플레이에 감탄했다. 김병지의 9 실점은 56개의 유효슈팅 가운데 나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방어율이 뛰어났던 것이다.

김병지는 이 해 울산에서 다시 한 번 인상적인 경기를 남겼다. 골키퍼인 그가 골을 넣은 것이다. 이 해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울산은 패했다. 울산은 결승에 진출하기 위해 2차전을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절실히 골이 필요했던 경기에서 경기 종료 직전 김병지가 골문을 버리고 뛰쳐나가 골을 넣어 팀을 구했다.

쇼맨쉽이 남달랐던 김병지는 가끔 공을 중앙선 부근까지 몰고 나오는 플레이를 펼쳤다. 팬들은 좋아했지만 감독으로서는 걱정거리였다. 김병지의 튀는 플레이에 엄중경고를 내렸던 고재욱 감독도 골을 넣고 달려오는 김병지를 얼싸 안으며 기뻐했다.

그런 울산에서 김병지 선수가 은퇴식을 치른다. 박수를 보낸다.

<강귀일 취재2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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