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어린선생님]남들은 교직을 떠날 때 교직으로 역주행한 공학도
[열정어린선생님]남들은 교직을 떠날 때 교직으로 역주행한 공학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9.3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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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진고등학교 김이헌 교장
김이헌 교장은 경북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뒤 현대자동차에서 Pony의 램프 부분 엔지니어로 근무했었다. 아직 우리의 기술이 부족하여 램프의 결함이 발견되곤 했었다. 이를 개선하려고 납품업체를 찾아 협조를 요청하면 기술개발보다는 적당히 넘어가려고 다른 짓만 하려고 드는 데에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마침 공업과 준교사 자격증도 있어서 1978년 임용고사 시험을 치르고 합격이 되어 농소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았다. 그때의 ‘안도감’은 이제야 내가 갈 길을 찾았다는 것이었다. 그러고서 직장의 일은 스스로 즐거워하며 해야 한다는 태도가 길러졌다.

당시의 우리나라 사회는 많은 젊은 사람들이 교직을 떠나 다른 직장으로 옮기며, ‘자기 발전(?)을 모색하던 시절이었다.’ 첫 발령을 받았을 때, 담당 장학사가 ‘몇 개월 뒤에 다시 기업체로 갈 것인가?’의 충고 아닌 걱정을 하던 때였다. 그만큼 교직의 사기가 떨어졌을 때 김 교장은 오히려 안정을 찾은 마음이었다. 그렇다고 무사안일의 나태함 때문인 것은 아니다. 사실 어느 대학의 교수가 연구는 안 하고, 나태함의 극치를 보이며, 이런 철 밥통이 어디 있느냐고, 누가 볼세라 화장실에서 지금도 혼자 웃고 있다. 김 교장은 남이 안하는 것을 기꺼이 찾아가는 도전정신의 표본이다. 예로서, 전국의 어디이건 새로 길이 뚫렸다고 하면, 꼭 한번은 가보아야 직성이 풀릴 정도이다. 아마 울밀선(울산과 밀양)을 처음 운전해본 선생님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도전 정신이 울산의 학교에서 멀티미디어 활용을 경남과 울산을 대표하여 개척한 산증인이다. 대부분의 교사가 익숙하지 않은 분야라고 기피하고, 망설일 때, 스스로 연구하고 일반 전자업체의 자문을 받아 교육적 활용을 수립한 교사이었다.

김 교장은 남창 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1971년) 남창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이럴 때 당시 국어과 안종혁 선생님(지난 9월 17일자의 김종한 교장이 교사가 되겠다는 멘토가 되었던 분)이 부임하셔서 학생들을 열정으로 가르치셨다. 밤에는 카바이드 등을 사서 교실에 켜주고 그 밑에서 학생들이 진짜 ‘자율 학습‘을 하여 경북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김 교장은 울주군 온양읍 삼광(상광, 중광, 하광?)리의 중광(中光)이 태어난 고향이다. 작고하신 김지웅 교육감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지웅님으로부터 많은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울산에는 3대가 한 학교에 근무하는 곳이 더러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김이헌 교장이 청량중학교에 근무할 때, 은사이신 안종혁 선생님이 교감으로 계셨고, 김이헌 부장 선생님이 제자 김원종 교사와 함께 있었다. 할아버지, 아들, 손자가 한 집에 같이 사는 안정된 모습이다. 교직에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하다.

김 교장의 학교운영의 기본 철학을 물어보았다. 한마디로 원만한 ‘의사소통’이라고 한다. 동료 간에, 상사와의 관계에서 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면 안 될 일이 없다는 소신으로 일을 한다. 이렇게 되면 더불어 ‘즐겁게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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