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과 빈틈
느림의 미학과 빈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6.14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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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 때 ‘지구가 세계의 중심이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天動說)을 다들 믿고 있을 때, 한 과학자의 집념어린 연구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게 만든다. 이는 중세적 사회질서의 근간과 안정을 송두리째 뒤흔든 사건이었다. 그런 창의적인 발상과 연구는 과거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어김없이 작동하고 적용되어야만 한다. 오늘은 행복과 관련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행복을 위해선 먼저,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여야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속도지향주의와 성과지향주의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30분 결혼식, 8분 식사는 우리의 일상 패턴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최초의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즐겨 쓰던 ‘페스티나 랑테’는 ‘천천히 서두르라’는 말이다. 성급함을 금물이라고 여겨 경계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며 지금 말로는 ‘천천히 그리고 빨리’가 적당할 것 같다. 달팽이 안에 있는 토끼, 돛을 달고 있는 거북이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행복을 위해선 빈틈이 있어야만 한다. 인간적인 인간관계를 위해서 이는 절대적이다. 이란에서는 아름다운 문양으로 섬세하게 짠 카펫에 의도적으로 흠을 하나 남겨 놓는다고 한다. 흔히들 우리는 그것을 ‘페르시아의 흠’이라 부른다. 인디언들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깨진 구슬을 하나 꿰어 넣는다. 그것을 ‘영혼의 구슬’이라 부른다. 제주도의 돌담은 여간한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돌담을 살펴보면 돌과 돌의 사이를 메우지 않았는데 틈새로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심리학자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완벽한 사람보다 어딘가에 부족한 듯이 빈틈이 있는 사람에게 인간미와 매력을 느낀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이 들어설 수가 있는 빈틈이 있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물리적 틈새가 아닌 제3의 공간인 틈새가 존재할 때에 인간관계가 형성이 된다. 내 마음에 빈틈을 내고 나 자신의 빈틈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의 빈틈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주도의 돌담처럼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는 사람냄새 나는 인간관계를 만드는 비결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행복의 가치 기준을 논하는 진부한 이야기다. 한국에서는 중산층을 부채 없이 아파트 30평 이상, 월급 500만원 이상, 자동차는 2천cc 이상을 대체로 꼽고 있는 등 형이하학(形而下學)적 경제적인 수준에만 비중을 두는 반면에, 프랑스 등 유럽 나라는 형이상학(形而上學)적 정신세계와 연계하는 개념으로 접근한다. 프랑스의 중산층은 외국어 하나 할 줄 알고, 다룰 줄 아는 악기 하나 정도,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며, 미국은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고, 영국은 페어플레이 등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외형의 지표를 따지는 것에 비해 유럽은 경제적인 지표 외에 문화 참여, 봉사활동 등을 꼽고 있다.

행복지수를 논할 때 히말라야 동쪽에 있는 소국 부탄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아시아의 소국 부탄이 국민행복도에서 세계 1위라는 보도가 있었다. 부탄은 국민소득 2천500달러의 가난한 나라다.

인도와 중국 티베트자치구 사이에 있는 인구 75만여명의 소국, 부탄은 100명 중 97명이 “나는 행복하다”고 답할 만큼 행복지수가 높다. 1999년에야 비로소 TV시청이 가능해졌고, 외국원조도 거절한 나라. 심지어 담배 제조와 판매도 국법으로 금지한 특이한 나라라고 할 수 있지만, 물질만능시대에 자기만의 행복의 가치는 정신세계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기회에 우리 모두의 행복 가치 기준은 무엇인지 음미해 보고 반성해 보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한다.

<신영조 시사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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