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동백처럼 꽃피운 ‘다산학의 산실’
한겨울 동백처럼 꽃피운 ‘다산학의 산실’
  • 강귀일 기자
  • 승인 2016.06.09 21: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라남도 강진 ‘다산초당’
◇ 다산, 유배지 강진에서 학문적 열정 불태워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 1836) 선생은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를 집대성한 문집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와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이 이 문집에 실려 있다. 방대한 다산의 저서는 대부분 유배지인 강진 땅에서 완성됐다. 다산은 마흔 살 때 강진 땅을 처음 밟았다. 그리고 쉰일곱 살 때 해배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18년의 기간은 학자 정약용의 황금기였다. 다산은 유배지에서 학문적 정열을 불태웠다.

◇ 구강포 품은 강진 땅

전라남도 서남쪽 남해안에 육지로 좁다라면서도 깊숙하게 파고들어온 만안(灣岸)이 있다. 강진만(康津灣)이다. 강진만의 깊숙한 곳에 강진읍이 있다.

강진의 북쪽으로는 월출산을 사이에 두고 영암이 있다. 동쪽 장흥에서부터 흘러온 탐진강은 강진 땅을 적시고 강진만으로 들어간다. 이 강진만은 탐진강의 하구이기도 하고, 그밖에도 많은 하천이 흘러들기 때문에 아홉 고을의 물길이 흘러든다는 뜻으로 구강포(九江浦)라고도 불린다. 강진 땅 서쪽은 해남이다.

다산이 사학(邪學, 천주교)에 물든 죄인이라는 죄명을 덮어쓰고 강진에 귀양 온 것은 순조 1년(1801) 11월이었다.

다산이 처음 강진에 도착했을 때는 강진읍 동문 밖에 있던 주막집에 겨우 거처할 방 한 칸을 얻어 기거했다. 다산은 그 주막의 뒷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당호를 지어 붙이고 만 4년을 지냈다. 사의재란 생각, 용모, 언어, 동작의 네 가지를 의로써 규제하여 마땅하게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이다.

1805년 겨울부터는 강진읍 뒤의 보은산에 있는 고성암 보은산방에 머물며 주로 주역을 연구했다. 그 다음해 가을부터는 강진 시절 그의 애제자가 된 이청(李晴)의 집에서 기거했다. 마침내 다산초당(茶山草堂)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 귀양살이 8년째 되던 1808년 봄이었다.

옛 초당은 무너져서 1958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주선해 건물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초당을 다시 지었다.

◇ 다산학의 산실, 다산초당

강진읍에서 남서쪽을 향해, 구강포 서쪽 모퉁이를 끼고 비스듬히 내려오면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에 닿게 된다. 이 마을 뒤의 만덕산 기슭에 다산초당이 있다. 비록 유배지이기는 하나 다산학의 정수가 한겨울의 동백꽃처럼 붉게 피었던 곳이다.

다산초당은 본래 귤동마을에 터잡고 살던 해남윤씨 집안의 귤림처사 윤단의 산정이었다. 해남윤씨는 다산의 외가 집안이었다. 다산의 어머니가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다.

귀양살이가 여러 해 지나면서 삼엄했던 관의 눈길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자 정약용의 주위에는 자연히 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가운데 윤단의 아들인 윤문거 형제가 다산을 다산초당으로 초빙했다.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오솔길 가에는 대나무와 소나무가 빽빽해서 대낮에도 그늘이 짙다. 소나무 뿌리들은 뒤엉켜 자연스럽게 비탈길의 계단 역할을 한다. 이 비탈길 한켠에 무덤이 하나 보인다. 이는 윤단의 손자이며 정약용의 제자였던 윤종진의 무덤이다. 동그란 눈과 손가락이 앙증스러운 자그마한 동자석 두 기가 말간 얼굴로 무덤 앞을 지킨다.

그곳을 지나 좀더 오르면 동백나무가 우거진 곳에 다산초당이 보인다. 다산은 이곳에 전부터 있던 윤단의 초당 좌우에 동암과 서암을 짓고 주로 동암에서 기거했다.

지금 다산초당에는 터에 비해 조금 크다 싶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초당’이 있고, 그 양옆으로 역시 기와를 이은 동암과 서암 그리고 좀 떨어진 동쪽 산마루에 천일각이 있다.

초당에 걸린 ‘다산초당’ 현판과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寶丁山房) 현판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새긴 것이다. 그중 ‘다산초당’ 현판은 추사의 글씨를 여기저기서 집자해 만든 것이지만 ‘보정산방’은 김정희가 중년쯤 되었을 무렵 일부러 쓴 것인 듯, 명필다운 능숙한 경지를 보인다. 동암에는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동암’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 있다.

다산초당에서 다산의 손이 닿았던 흔적으로는 초당 옆의 연못과 앞마당의 넓적한 바위 그리고 집 뒤의 샘과 그 뒤편 바위에 새겨진 ‘정석’(丁石) 두 글자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집 뒤의 샘은 그가 마시던 그 샘이며, 앞마당의 바위는 그가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이던 곳이라 하여 다조(차 부뚜막)라 불린다. 손수 써서 새긴 ‘정석’ 글자에서는 단아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정 붙일 만한 거처를 얻은 다산의 기꺼움과 이곳에서 꾸려갈 생활에 대한 결의를 느낄 수 있다. 글·사진=강귀일 기자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