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충신 박제상에 대한 논란들 (下)
신라충신 박제상에 대한 논란들 (下)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5.12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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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연구회’에서는 정자동사무소 북쪽 약 4백 미터 지점의 벽산아진비치타워아파트에 못 미친 ‘언덕한우숯불갈비집’ 도로 맞은편(서쪽) 언덕 위를 발선처(發船處)라 추정하고, 1989년 10월 화강암 자연석 비석에 「신라충신박제상공사왜시발선처(新羅忠臣朴堤上公使倭時發船處)」라 기록하여, 그 날 박제상의 장도(壯途)를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경주인들은 박제상 발선처를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 또는 진리(津里)라고 주장한다. 이곳 바닷가에는 김씨 부인이 떠나는 남편 박제상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는 ‘동메’라는 작은 산이 있다.

하지만 울산 정자 앞바다에는 이런 설화가 전해오는 곳이 아예 없다. 박제상이 입실재를 넘어 진리로 가서 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었는데, 굳이 머나먼 강동 앞바다까지 갔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진리에도 율포라 불리는 곳이 있다고 한다 [장성운의 ‘울산이 보인다’ 치술령편, 경주인 김대원의 ‘서라벌 망부석 아직도 울음 운다’]. 필자가 입실재를 넘어 진리 바닷가에 가본 결과, 경주인들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치술령(?述嶺) 정상의 망부석(望夫石)과 망부천(望夫泉)은 두 짝이 존재하는데, 울산 것이 맞는지 경주 것이 맞는지 답사자들 역시 헷갈리고 있다. 치술령 정상 서쪽의 울산 쪽 망부석에 1980년 ‘望夫石’이란 글씨를 새기기 전에는 두 지역 사이에 논란이 없었다. 논란의 발단은 치술령 정상에 울주군 두동면과 경주시 외동읍의 경계선이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1987년 당시 울주군수가 치산서원을 복원시키려는 과정에, 당시 신라 역사와 불교 문화의 권위자였던 황수영 박사와 한국교원대 교수였던 정영호씨에게 박제상에 대한 학술조사를 의뢰했다. 이들 학술조사단은 4차의 답사 끝에 울산 쪽과 경주 쪽 망부석을 모두 인정했다고 한다. 치술령에 가보면 알겠지만, 정상 남쪽의 경주 쪽 망부석에서는 동해의 양남면 진리 쪽이 보이지만, 울산 쪽 망부석에서는 동해가 보이지도 않는다. 김씨 부인이 동해를 바라보며 남편의 순국 소식을 듣고 망부석에서 떨어져 죽었는데, 울산 쪽 망부석은 낮아 떨어져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경주 쪽 망부천은 필자가 볼 때마다 물줄기가 수돗물처럼 풍부했는데, 정상 북쪽 기슭의 울산 쪽 망부천은 가물 때는 식수로 사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량이 적었다.

필자가 보기에 울산 쪽 망부석과 망부천은 답사객들에게 그 설득력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위 학술단이 엄밀한 고증도 하지 않고 성급하게 망부석을 지정해 후세들에게 혼란만 더 가중시켰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1988년 일본 대마도에 건너가 상현부에 박제상의 순국비를 세웠는데, 순국비 건립 역시 성급한 조치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박제상이 순국한 곳을 목도라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여러 역사서에서는 그 순국지가 대마도가 아니라 박다진(博多津) 즉, 하카다(후쿠오카)라고 하고 있다.

박제상은 용맹과 지혜의 화신으로 신라 최고의 충신이었는데, 그는 우리 민족이 파미르고원에서 황허강(중원)과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민족의 이동경로를 밝힌 ‘부도지(符都誌)’라는 유명한 역사서를 남기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은 박제상 일가의 삼절정신(三節精神)을 오늘날까지도 추앙·칭송하고 있다. 즉, 박제상의 충절(忠節), 김씨 부인의 정절(貞節), 두 딸의 효절(孝節)을 삼절이라 일컫는데, 세계 역사상 일가 삼절의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필자는 울산과 인연이 있는 박제상가의 삼절 정신을 울산의 후학들이 체험해 생활화할 수 있도록, 박제상 유적지가 있는 박제상기념관·치산서원-치술령 정상-은을암까지 약 7km의 역사탐방로와 절경의 등산로를 연결시켜 가칭 ‘박제상 역사공원’으로 조성하면 울산 장래의 정신세계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본다.

김원 등산전문작가/향토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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