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5.01 18: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릴 적에 들은 어르신들의 말씀은 지금 들어도 무릎을 치게 만든다. 인생의 깊은 경륜에서 우러난 살아있는 교훈들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 말씀들 중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이 있다. 학식이나 교양이 있고 수양을 쌓은 사람일수록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을 이르는 말이다.

표현은 달라도 같거나 비슷한 뜻을 지닌 속담은 여럿 있다. “곡식 이삭은 여물수록 고개를 숙인다”, “여문 곡식일수록 더 머리를 숙인다”, “물이 깊을수록 소리가 없다”, “병에 가득 찬 물은 저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속담들이 그런 본보기들이다.

좀 더 직설적인 표현들도 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속담이 대표적이다. 속담집 ‘우리 속담 풀이’는 “빈 수레가…”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더 아는 체하고 떠든다는 말’, 또는 ‘가난한 사람이 있는 체하고 유세 부릴 때 빈정거리는 말’이라고 풀이한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속담에 “도랑물이 소리를 내지 깊은 호수가 소리를 낼까” “들지 않는 솜틀은 소리만 요란하다” “먹지 않는 씨아에서 소리만 난다” “못 먹는(안 먹는) 씨아가 소리만 난다”가 있다.

아직 한 달이 채 안 됐지만 4·13 총선은 많은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정치지형을 ‘여소야대’로 만들었고, 더불어민주당을 ‘여의도 제1당’으로 만들었고, 신생 국민의당을 ‘지지율 제1 야당’으로 만들어 놓았다. 변화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대선주자들의 지지율 순위마저 마구 헝클어 놓았다. 지지율 17% 문재인(더민주)을 2위로 끌어내리고 지지율 21% 안철수(국민의당)를 1위로 끌어올렸다. 더욱이 천하를 호령할 것 같은 김무성(새누리당)을 같은 당의 유승민보다 더 아래, 최하위로 내동댕이쳤다.

변화의 미친바람은 지방의 정치지형도 뒤집어 놓았다. 한국갤럽 여론조사를 인용한 뉴시스는 1일자 기사 제목을 ‘PK(부산·울산·경남)가 더민주에게 넘어가고 있다’고 달았다. 내용인즉, “한국갤럽이 지난달 26~28일 성인남녀 1천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당 지지도 조사에서 울산을 포함한 PK지역에서 새누리 34%, 더민주 33%, 국민의당 15%로 더민주가 (1%포인트 차로) 새누리당을 턱밑까지 추격했다. 금명간 더민주가 새누리를 제치고 PK지역에서 지지율 1위 정당이 되는 것 아니냐는 때 이른 관측도 나온다”는 것이었다.

내친김에 가설을 하나 내자. 4·13 총선이 가져다준 변화 중 가장 유의미한 변화는 어떤 것? 그 대답은 물론 평자의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의당의 약진’이라고 보는 평가가 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숨기기가 힘들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는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를 느낀다. 국민의당 쪽에서는 “당 지지율에서 더민주를 앞섰으니 우리가 제1야당”이라며 기정사실로 몰아간다. 새누리당과의 연정(聯政) 가능성도 내비쳤다. 청와대에서 “국정 운영 잘못노라” 고개 숙이는 말 한마디만 해주면 국회의장 자리는 여당에 돌려주겠다며 큰소리도 서슴지 않는다. (후자는 물론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지만…)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을 새삼 기억의 곳간에서 끄집어내려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눈에 뵈는 게 없으면’ 겁이 없어지고 자칫 ‘기고만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모든 정치인이나 대선주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경고 메시지가 하나 있다. 1년 9개월 남은 대통령선거 때까지 또 어떤 정치적 돌발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메시지다. 잠시 우뚝 선 것처럼 보인다고 우쭐대다가는 언제 어디서 정치적 칼침을 맞을지도 모른다. ‘아마추어’니 ‘구상유치(口尙乳臭)’니 하는 소리 안 나오게 제발 좀 자중자애 했으면 한다.

<김정주 논설실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