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단상
선거 단상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4.17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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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한쪽에서는 침통함이 또 다른 쪽에서는 환호성을 올리게 만든 하룻밤의 짜릿한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런데 개표 방송의 와중에서도 ‘태양의 후예’라는 또 다른 드라마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의미를 새겨보는 선량들이 있을까?

매슬로우는 인간의 행동에는 반드시 동기가 있는데, 동기란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긴다고 하였다. 욕구들은 단계별로 나타나 아래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면 상위 단계의 욕구 만족을 향해서 나아간다.

매슬로우의 ‘동기위계설’ 중에서 가장 아래 단계의 욕구가 생리적 욕구이다. 이는 인간이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배고픔을 해결하고 고통을 회피하며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행위이다. 생계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벌이, 배우자와 만나 가정을 이루고자 하는 소박한 희망, 비바람과 추위를 피하기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욕구 충족을 위해 대부분의 국민들은 각자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다.

만약 모두가 본능적인 행위만을 위해 살아가게 된다면 이 사회는 홉스가 말했듯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충족된 생리적 욕구가 다른 사람에 의해 언제든지 침해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게 되고, 이는 자신의 자유를 조금씩 제한해 그 힘을 국가라는 큰 조직에 위임함으로써 이룰 수 있게 된다. 즉 국가는 모두에게 위임받은 이 권력을 가지고 법 앞의 평등이라는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게 되고 이를 통해 개인은 기본적인 안전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안전의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 단계로 소속 및 사랑의 욕구가 생기게 되는데, 이 욕구의 좌절은 군중 속에 소외를 불러와 충족된 아래 단계의 욕구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행복할 수 없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사회 속에서 소외당하지 않기 위하여 관계를 맺게 되고 이 관계 속에서 소속감과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매슬로우는 반드시 충족되어야만 하는 결핍 욕구의 마지막 단계로 존경의 욕구를 들고 있다. 이는 성취욕이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 특권 및 지위에 대한 욕구 등으로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선택되어진 존재뿐이다. 존경이란 내가 원한다고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바쳐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국민이 안전을 담보로 스스로 위임한 권력을 양도받은 국가가 그 권력을 양도한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운용했을 때에 비로소 얻어질 수 있는 명예이다. 이 권력을 위임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국회의원을 비롯한 선출직 공무원들이다. 그런데 그들 중 대부분은 존경의 욕구가 그들이 당선되는 순간 따라오는 전리품으로서 충족되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선거기간 내내 90도 이상 굽혀지던 척추가 당선되는 그 시간부터 갑자기 구축이 와서 뻣뻣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갑작스런 당선인들의 척추관절 구축증은 환자 자신은 질병에 걸렸다고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메르스보다 더 위험한 전염병이 아닐까? 그런데 환자 스스로 병식이 없는 질환들은 환자가 병식을 인지하는 때부터 치료가 시작되므로 의사들은 그들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를 지켜보면서 매슬로우의 동기위계설이 떠오른 것은 나의 억지일까? 별 다른 정책대결도, 이슈도 없었던 이번 선거에서 근래 보지 못했던 높은 투표율과 예상치 못한 선거결과가 의미하는 바를 당선인들은 정말 이해하고 있을까?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소박하다. 매슬로우의 기본욕구 중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 및 사랑의 욕구 정도를 충족시켜주는 사람에게 존경을 보내는 것이다. 그들이 선거 기간 중 목이 쉬도록 외쳤듯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며 헌신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대표자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선자들에게 기꺼이 그 많은 특권들을 용인해주고 있는 것이다. 70% 이상의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된 분도, 투표율을 감안하면 유권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만이 자신을 지지했을 뿐이라는 진실을 외면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번에는 제발 ‘혹시나’가 ‘역시나’의 도돌이표로 마감되지 않았으면 하는 절망적인 희망을 품어본다.

<최순호 울산과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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