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성(藝術性)에 관하여
예술성(藝術性)에 관하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9.2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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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엉큼하기로, 상대방을 우롱하는 거짓말 대장으로, 특정 종교의 가치로 남을 가장 사랑하고 배려해주는 척 하기로,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만 챙기기로, 토플(toefl)시험도 보지 않고 미국의 어느 유명대학에 입학하고, 한국의 해당분야 연구원을 온갖 수단으로 동원하여 박사학위를 받아 그이 주변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한마디로 아주 계산적인 삶을 살기로 소문났던 사람이 나이 75세(아마 그 이상?)에 개인전(個人展)을 갖는다고 한다. 피카소가 대한민국에 환생하였다.

만만한 게 홍어 젖이라고 예술적이어서 고상하게 보이는 것이 미술인가 보다. 대학은 제쳐놓고, 초등(국민)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미술반 근처에도 얼씬 거리지 않던 사람이 한 2, 3년 사회(평생)교육원에서, 시중의 미술학원에서 그림그리기를 연습하다가 개인전을 갖는다고 초청장을 보내고,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가 ‘어디 그림이나 그려볼까?’에서 붓으로 장난삼아 놀이하던 그림을 작품이라고 전시한다.

이것은 문학작품인 것처럼 수필집을 내면서 여기저기 뿌리는 것과 같다. 이진섭(소설 동의보감의 발문에서)이 ‘글이란 아무래도 딱지처럼 이미 토막치고 잘려버린 정신의 때요, 비듬 같은 것이라는 사념에 사로잡혀 괜히 역해 있곤 했던 것이다. 그 때, 비듬, 딱지를 누룽지 긁듯이 긁어보아 그럴 듯이 장정하고 검인 찍어 ‘내 글, 내 말씀’입네 산지사방 외고 다니면서…’라고 개탄하는 것과 같다.

예술성은 소일거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지 않고는,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장의 용솟음이 있어야 미술의 예술성이 나오기 시작한다. 임어당(林語堂, 1888-1976)은 사이비 학자와 진지한 사색가를 갈가마귀와 누에고치로 구별하였다. 남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여 글을 쓰는 사람은 먹이를 물어다 그대로 토하여 새끼에게 먹이는 갈가마귀와 같고, 이들은 남의 글을 보다 많이 인용하여 더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사이비 학자이고, 뽕잎을 먹고 비단실을 뽑아내는 누에고치처럼 남의 글을 읽고 소화시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베기는 상태의 사람이 진지한 사색가라고 한다. 미술도 ‘예술가로 산다는 것(박영택)’에서처럼 일곱 명의 미술가들이 밥을 언제 먹었는지 모르고 그저 작품에만 빠져 있듯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쏟아내지 않고는 못 베기는 사람들의 전시회에서 예술성이 나타난다. 독창회도, 피아노 연주회도, 무용발표회도, 연극도 그리고 수필집도 흉내 내기와 끓어오름의 차이에서 사이비와 예술성의 차이가 나타난다.

피카소의 그림과 남아메리카의 동굴의 벽화에서 어딘가 서로 비슷한 점이 관찰된다. 그 비슷한 점의 맥(脈)은 ‘끓어오름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마음’에 있다. 보여주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름’을 나타낸 것이다. 피카소가 80세에 40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이혼녀와 일곱 번째 결혼하는 것도 이런 ‘끓어오름’이 있었기 때문일 것 같다.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가 바로 피카소의 작품과 너무나 닮았다. 그때, 그 사람들의 끓어오름이 예술로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다. 가뭄 때 다시 찾아볼 곳이다. 예술성이 거기에 있다.

/ 박문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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