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그늘 아래
목련꽃 그늘 아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4.06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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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박목월 ‘4월의 노래’)

박목월 시인이 살았던 서울 원효로의 2층집에는 큰 백목련이 한 그루 있었다. 서울에 처음 집을 마련한 그가 장남과 직접 심은 나무였다고 한다.

창이 유난히 넓었던 2층 작업실까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 백목련은 원효로의 봄소식을 한껏 전해 주었다.

이 가곡은 선율과 노랫말이 모두 싱그러운 봄날처럼 아름답다. 8·15 광복과 정부수립, 그리고 민족상잔의 6·25 전쟁 등이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 친 그 무렵, 시대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창간된 잡지 <학생계>의 위촉으로 시인 박목월이 쓰고 김순애가 작곡했다. 이 곡은 암울했던 그때, 학생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태어났다. 이후 1960년대부터 학생들이 즐겨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적인 선법을 바탕으로, 간단한 음절의 질서 있는 전개로써 노래가 이루어진 것은 동경 어린 가사와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언제 불러도 가슴 설레는 이 노래는 국민들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널리 애창되었다.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이 노래의 가사를 찬찬히 음미해 보면, 원효로 2층집의 백목련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그 황홀한 목련꽃 그늘 아래 자리한 작은 사랑방에서 목월은 ‘심상(心象)’이라는 월간 시지(詩誌)를 발간했다. 비품이라고는 나란히 놓은 책상 두 개와 사물함 몇 개가 전부였고, 두세 사람만 들어서도 방안이 가득 차는 그리 넉넉지 않은 공간이었다고 후배 문인들은 전한다. 목월의 작은 방은 그가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전문지 ‘심상’의 편집실이자 시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었다.

‘4월의 노래’ 속에서 언제나 목련은 그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꽃눈이 붓을 닮아서 목필(木筆), 꽃봉오리가 피려고 할 때 끝이 북녘을 향한다고 해서 북향화라고도 하는 목련.

꽃이 아름다워, ‘양화소록(養花小錄)’의 ‘화목구등품제(花木九等品第)’에서는 7등에 속했다. 또한 목련의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잎보다 꽃이 먼저 나며 정갈한 맛이 있어 고고한 선비나 군자(君子)를 상징하기도 했다.

‘오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봄에 온 가인과 같고/ 추운 겨울 헤치고 온/ 봄길잡이 목련화는/ 새 시대의 선구자요/ 배달의 얼이로다/ (…) 그대처럼 순결하게/ 그대처럼 강인하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라/ 오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라’(조영식 작시, 김동진 작곡 ‘목련화’)

‘가고파’ ‘봄이 오면’ 등 불멸의 노래를 작곡한 김동진의 ‘목련화’에 얽힌 일화는 이렇다. 경희대학교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인 조영식은 평소 음악을 좋아해 작곡가 김동진을 음악대학장으로 초빙해 음대를 육성토록 했다. 이에 부응하듯 김동진은 테너 엄정행과 팽제유를 직접 길러 냈다.

국민 애창곡으로 자리매김한 ‘목련화’는 음대 학장이던 조영식 총장의 간청으로 작곡하게 되었는데 그 작사자는 바로 조 총장이었다. 김동진은 그 곡을 작곡하며 성악가도 미리 염두에 두었다. 엄정행과 팽제유였다. 작곡이 완성되자 최종 단계에서 엄정행을 낙점, 100여 번의 고된 연습을 시킨 끝에 마침내 ‘목련화’를 세상에 내놓게 된다. 훌륭한 작곡가 김동진은 세상을 떠났지만 목련의 강하고 순결한 이미지는 우리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늘 메아리치고 있다.

가슴 뛰는 4월이다. 박목월 시인은, ‘4월의 노래’에서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고 했다. 부드럽고 포근한 4월의 바람. 눈부시게 하얀 목련꽃 그늘 아래서 ‘4월의 노래’를 나지막이 부르며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어 봄은 어떨까.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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